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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한국의 논점 2017』(북바이북, 2016)에 독서에 대한 글을 한 꼭지 실었다. 세밑에 이 책 전체를 훑어 읽었다. 헌법재판소에서 아마도 탄핵이 인용된 후에는 사회 변화를 위한 진짜 싸움이 한국사회 전체에서 분출할 것이다. 과도하게 국가에 예속되고 처참하게 자본에 기울어져 있는 한국사회를 개벽하는 치열한 논쟁이 곳곳에서 벌어질 터인데, 광장의 촛불이 사회 전체로 옮겨 붙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챙기고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한국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이룩할 앞으로의 싸움에서 이 책은 모든 촛불시민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쟁점들에 대한 중요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이런 책에 한 꼭지를 맡아서 기쁘고 또 부끄럽다. 아래에 글의 일부를 제목을 바꾸어 옮겨둔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퇴근 후에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서 『오이디푸스 왕』 같은 고전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 있다고 하자. ‘듣는 독서’도 있으니까 저자를 초청해서 신간에 대한 강의를 들어도 좋다. 휴식을 통해서 피로한 육체를 다스리고 노동력을 재생산할 이 시간에,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과 맞지 않는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은 정말로 허영에 지나지 않는 일일까. 가방끈 긴 화이트칼라, 돈 많고 재산 있는 부르주아, 여가시간 넘치는 학생이나 할 법한 문학 읽기 모임보다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노동의 가혹한 피로와 세상에 대한 울분을 나누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적어도 술자리에서는 엉뚱한 허위의식이 찾아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읽기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이 문제에 부닥친다. 돈도 밥도 안 되는 읽기가 도대체 삶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말한다.


문학 토론 같은 지적 활동을 하는 노동자들. 이들은 계급과 신분의 한계와 분할의 틀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넘어, 다른 사회적 존재 양식을 시도함으로써, 이미 만들어진 분할의 틀을 해체하고 기존의 억압적 사회 질서를 거슬러서 좀 더 민주적인 감각의 추구와 배분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험하면서 그 파급 효과를 몸소 보여 주고 있다.


노동자들이 모여서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것은, 지배 권력이 미리 배분해 둔 사회적 역할을 넘어서 “또 다른 사회적 존재 양식을 시도”하는 해방의 행위다. 사회에서 정해 준 대로 살아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 명령이 가져오는 온갖 억압을 해체하면서 자기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험하는 일이다. 읽기를 통해 자기 삶에서는 좀처럼 힘든 이질적인 감각을 느껴 보는 것은, 일상 속에서 특정한 형태로 굳어진 감각을 해체하여 재배치하는 일이고, 자기 안의 잠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읽기를 통한 감각의 혁신은 곧바로 삶의 혁신이며, 자신의 한계를 탈주하는 개척이다. 배분되어 습관적으로 익숙한 감각으로부터 일상에서는 허락받지 못한 낯선 감각의 세계로 과감하게 옮겨 가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읽기를 통해 우리는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가 깨어지는 경험을 한다.

사회적인 틀에 좁게 갇혀 있던 눈이 세계 전체로 확장되면서 개체로서의 자립과 시민적 자유를 이룩하는 데 읽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직접 보지 않은 것을 보여 주고, 듣지 않은 것을 들려주며, 느끼지 못한 것을 감지하도록 해 주는 읽기를 통해서 인간은 주어진 시공간이 강제하는 사회적 한계를 초월하여 자기를 새롭게 발명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서 공동체 중 하나인 상록독서회를 찾았을 때, 이 사실을 새삼 느낀 바 있었다. 


읽기는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서 때때로 종교를 넘어서고, 한 사회를 바꾸는 일에서 때때로 정치를 능가한다. 책을 함께 읽는 것은 타자의 혀로 자신을 고백하는 행위다. 마음의 닫힌 문을 두드려 열고, 생각의 굳은 근육을 주물러서 푸는 작업이다. 삶에서 사랑의 형식을 발명할 때, 즉 하나에서 둘로 가는 방법을 발굴할 때 비로소 희망이 우리를 찾아온다. 읽기는 더 없는 은밀함과 친밀함 속에서 타자를 환대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혁명하는 힘을 촉발한다.(장은수, 「군사독재 어둠을 깨며 함께 읽기 35년」, 《한국일보》, 2015년 10월 16일)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발전이 사회 전체를 나날이 혁신하는 시대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기술이 가져오는 급격한 변화 때문에 과거의 경력이나 경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의 사태를 ‘미래의 충격’이라고 불렀다. 미래가 연속해서 충격으로 다가오면서 삶 전체의 아노미가 그치지 않는 시대에는 변동하는 사회에 발맞추어 ‘삶의 자세’를 유연하게 가다듬고 적응하는 능력이 인간 능력의 중핵이 된다. 세상의 변화를 좇아서 자기 이야기를 다시 쓸 줄 아는 창조성이 부족한 사람은 충격을 극복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특히,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인지자동화가 조만간 실현된 후에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이에 대한 한 예감이 올해 초에 있었던 ‘알파고’ 이벤트였다.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이 벌인 세기의 바둑대결은 끝내 알파고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알파고의 충격’은 ‘인간이란 앞으로 무엇인가’ 또는 ‘인간이란 앞으로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사회적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이종관은 이 대국으로부터 인공지능시대에 자칫 인간이 빠져들 수 있는 전락의 상징을 읽어 낸다. 


이 대국에서 주목을 받아야 할 존재는 역설적으로도 가장 존재감이 없는 존재, 아자황이었다. (중략) 아자황은 이번 대결에서 오로지 알파고의 아바타로만 존재하였다.(이종관,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찰」, 『2016 독서콘퍼런스 자료집』, 16~17쪽) 


동시에 이 대국은 인간이 얼마나 빨리 진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대국이기도 했다. 프로그래밍대로 학습해서 수를 놓는 알파고와 달리, 이세돌은 변화하는 반상의 세계 속에서 과감한 시도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투를 통해 ‘기적의 한 수’를 찾아냈다. 아무리 애써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중한 사태 속에서 이세돌은 자신의 바둑을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수를 창안했다. 이러한 이세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간 진화의 진짜 비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파고 이벤트 이후, 한 달 만에 곧바로 출간된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동아시아)는 “창의성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버린 시대”를 선언했다. 이 책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분석해 얻은 결론을 과감히 실천할 수 있는 도전정신” 등이 인공지능시대에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핵심 능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스승의 말을 제자가 반복하는 기존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동안 인간 능력의 기준은 뇌라는 하드웨어에 지식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축적하는 휴먼 데이터베이스 구축 능력으로 정의되어 왔다. 머릿속에 다량의 지식을 쌓아두고,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빠르게 출력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한 편이었다. 판사, 변호사, 의사 등 이른바 ‘사’자 직업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이러한 직업들은 서서히 무력화된다. 손 안에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지식과 정보가 무한정 가득한 버추얼 데이터베이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정보의 단순한 축적은 컴퓨터가 대신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상황에 맞추어 주어진 정보를 새로운 정보로 적절히 창발하는 것이 인간의 주된 임무가 될 것이다. 김대식 교수가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창발 능력을 가리킨다. 끊임없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맞서서 주어진 정보를 과감히 재해석하는 능력이야말로 미래 인간의 필수 능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창조력’을 끌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읽기’다. 창조적이려면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에 대한 뼈아픈 부정과 그로 인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 기존 정보에 갇힌 나를 해체한 후 새롭게 나를 구축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정신이 아득히 찢기는 듯한 고통의 강물을 건너고, 영혼이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산맥을 넘어설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러한 무서운 고통에 익숙해지도록 정신이나 육체를 단련하는 방법을 호르메시스(Hormesis)라고 불렀다. 태권도나 무용 등을 배울 때 충분히 유연성을 갖출 때까지 매일 조금씩 다리를 찢어 서서히 고통에 무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상의 급변에 맞추어 자아를 반복해서 다시 쓰는 것 역시 훈련 없이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자아를 훈련하는 기술이야 여러 가지(명상, 노동, 사랑 등이 이에 해당한다)가 있지만, 읽기는 책만 있으면 별다른 계기 없이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책을 읽는 것은 타자의 사고를 내 안에서 반복하면서, 타자의 혀를 통해 나라는 이야기에 균열을 내고 또 다른 나를 생성하는 방법이다. 읽기는 고통스러운 것이고, 드물게는 자아의 완전한 죽음을 불러올 정도로 힘겨울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읽기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읽기는 또한 적절한 수준의 고통으로 정신을 훈련시킨다. 읽기를 통해 인간은 자아의 흥기와 쇠퇴, 생성과 소멸을 수없이 경험함으로써 영혼을 유연하게 하고 자아를 단련한다. 읽기가 발명되지 못했더라면 인간은 자아의 적응 훈련에 너무나 많은 힘을 쏟아야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다른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에 따르면,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사회생활의 주요 기술을 연습한다.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종으로서 인류가 성공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과제에 반응하도록 뇌를 연습시킨다.

꾸준한 읽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개벽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람도 미래사회를 대비하기 어렵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능력은 읽기를 통해서 훈련된 영혼에게는 자주 찾아오는 뮤즈와 같다. 지식정보사회가 심화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창조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시대에 읽기를 일으켜 시민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의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