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한 해 출판계를 정리하는 글을 여기저기에 쓰게 된다.
올해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출판을 들여다보면서 보냈지만,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몇 마디 말로 책의 풍요를
압축할 수 없어서 상당한 고민을 하게 된다.
출판 전문지인 《기획회의》는 해마다 연말이면
출판계 키워드 30을 뽑아서 한 해의 출판을 정리한다.
이 특집이 실린 《기획회의》 429호 여는 글에서 이를 요약해 보았다.
또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솟구침과 곤두박질의 롤러코스터에 적절히 올라타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일은 출판 편집자의 운명과 같지만, 올해는 유난히 일이 많고 말 또한 무성했다. 초연결사회에 걸맞게 순식간에 화제가 응집하고 소멸하는 ‘하이콘텍스트’ 시대가 열리면서 이에 따른 출판의 대응도 기민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앎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있는 곳마다 책은 반드시 그 자리에 같이 있으려 했고, 편집자들은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민감하면서도 심오한 언어를 세상에 세울 작정으로 한결같이 애썼다.
편집의 그러한 분투와 노력이 2016년 출판의 세계를 이룩했다. 해마다 《기획회의》가 연말 특집으로 기획한 출판계 키워드 30’은 출판을 통해서 본 한국사회의 풍경을 선명하게 요약한다. ‘알파고’와 ‘중력파’라는 경이로 시작해서 ‘맨부커 상’과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화제를 거치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과제인 ‘공급률’과 ‘도서정가제’ 등 여러 논란을 치른 후, 신자유주의 이래 한국 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폭발해 버린 ‘최순실’과 ‘무조건 하야’(진행 중이어서 미처 다루지는 못했지만)로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6년 한국 출판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할 것은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긴급한 이해의 필요성이다. ‘제4차 산업 혁명’ ‘인공지능’ ‘타이인 퍼블리싱’ ‘북 테크놀로지’ ‘큐레이션’ 등 여러 가지 키워드가 직간접적으로 이와 이어져 있다. 지구사와 진화론 등에 기반을 두고 인류가 걸어온 길을 조감하는 ‘빅 히스토리’ 열풍과 물리 시스템에 대한 법칙적 이해를 통해 우주와 사회를 통찰하려는 ‘물리학의 약진’은, 한국 출판이 이러한 세상에 대해 훌륭한 답안을 작성하는 중임을 잘 보여 준다.
독자의 필요에 빠르게 반응하고 소통하는 시기적절한 콘텐츠는 출판의 모든 고민을 해결하는 가장 훌륭한 솔루션이다. 과학책 열풍 이외에도, 해결 없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최초의 소설적 환기인 ‘거짓말이다’의 출간, 여성 혐오의 돌출과 ‘페미니즘’ 서적의 약진, 고령사회 진입에 발맞추어 확산된 ‘의미 있는 죽음’에 대한 성찰, 재난으로 가득한 정신없는 삶에 대한 내면적 극복인 ‘미니멀리즘’의 대두, 모멸의 일상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위한 ‘자존감 수업’, 정보재로 변해 실감을 잃어 가는 책의 물성에 대한 갈망의 표현인 ‘초판본 복간’ 등은 불황을 아랑곳 않는 책의 풍요는 항상 독자를 감동시키는 신선한 콘텐츠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한 해의 노고를 기록하는 자리에, 미처 다루지 못한 주제를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이 모든 활동을 궁극에서 이루는 것은 사람이다.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고 저자와 독자를 설득해 하나로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다면, 책의 세계에서 그 어떤 미래도 상상할 수 없다. 모멸적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잠재적 폭력과 불법적 해고 위협에 시달리면서 훌륭한 책을 오랫동안 만들 수 있는 직원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기획회의》는 지난번 ‘3년차 편집자는 어디로 갔을까’에서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시대에 대한 발 빠른 대응으로 이름 높은 몇 출판사는 동시에 어이없는 편집력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다가오는 해에 출판계가 이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지 않는 한, 출판의 사회적 위상에 목청을 높이는 것 자체가 자기 성찰이 부재한 한심한 소리로 전락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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