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경제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당연하다. 정치는 나와는 별 관련 없이 멀어 보이고, 먹고사는 문제는 피부로 와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는 지겨워하지만, 사실 정치가 무언가를 해결해 줄 수 없을 듯한 허무에 빠져 있지만, 경제를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을 퍼뜨리는 것이야말로, 부를 독점한 소수가 정말로 바라는 일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경제란 사회 바깥에 있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만 비로소 그 사회적 실체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소수가 부를 독점할 뿐만 아니라, 대항적 세력의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부를 독점하기 쉽도록 경제적 규칙을 끝없이 세부적으로 고쳐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1%의 소수가 99%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열심히 달린들 아무 소용도 없다.
따라서 경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라이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를 다수를 위한 것으로 민주화시키려면, 중산층이 되살아나고 지방이 재생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치를 이야기해야 한다. 즉, 경제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바라볼 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정치 경제학을 부활시켜야 한다. 이 책은 샌더스 진영의 정치 경제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다. 대선을 앞두고, 보수 우파들의 1%를 위한 경제논리에 속지 않으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에 가깝다.
아래에 문화일보에 실린 서평을 덧붙여 둔다.
‘자본주의를 구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원제는 Saving Capitalism. 차라리 ‘자본주의를 구하려면’이라는 가정에 가깝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 절정기에, 저자 로버트 라이시는 자본주의 멸망의 징조를 심각하게 읽어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두 차례 파멸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극복했던 자본주의의 기적 같은 치유력을 믿는 탓인지, 비자본주의적 사회의 출현 가능성을 전폐한 채 그는 붕괴로 치닫는 자본주의를 위한 긴급 구조신호를 발신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부(富)는 중산층과 빈곤층에서 부유층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부의 상향 재분배’는 자본주의의 탄생과 더불어 지속되었지만, 최근에는 그 상승폭이 유례없이 뚜렷하다. 부의 발생과 분배를 다루는 사회 규칙이 부자들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연속해서 조정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경제 번영을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데 힘을 발휘했던 노조, 단체 등의 대항적 조직이 지속적으로 그 힘을 잃어왔기 때문이다. 결과는 부가 소수에게 집중될 뿐만 아니라 부의 재분배를 둘러싼 정치적 합의마저 소수가 좌지우지하는 극단적 양극화, 즉 설국 열차의 실현이다.
“충분한 자원을 소유한 거대 기업, 대형 은행, 부자”들이 “돈으로 로비스트를 매수하고, 선거 후원금을 대고, 홍보 활동을 펼치고, 전문가와 연구자 집단을 갖추고, 변호사 군단으로 무장하고, 앞으로 일자리를 주겠다고 은밀히 약속”하면서 소수한테 부를 몰아주는 데 방해가 되었던 정치사회적 규칙들을 ‘규제 철폐’라는 허울 아래 조정한다. 게다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와 같이 사회 전체를 치명적 위기로 몰아넣은 탐욕조차도 ‘대마불사’나 ‘무전유죄, 유전무죄’ 같은 비열한 이유를 들어 사법 책임을 면제한다. 이에 비하면 학자금 대출을 받고 졸업했으나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젊은이를 떠올리면, 또 사회적 약자의 채무조정이나 파산신청 절차의 엄격함을 생각하면 정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아무리 위대한 시스템도 사회 구성원의 신뢰를 잃으면 도저히 존속할 수 없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의 규칙’이 오늘날과 같이 구축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신의성실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부를 둘러싼 규칙의 자의성과 불공정성이 심각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자신이 부정행위를 저질러도 용인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서슴없이 작은 부정들을 저지른다. 또한 기업 활동의 결과가 경영진에게 부당하게 집중된다고 생각하는 직원은 충성심이 떨어져서 자진해서 추가로 일하거나 사업 아이디어를 제출하는 등 특별히 회사를 위해 애쓰는 경우가 줄어든다. 게다가 조작된 게임에 이용당한다고 느끼는 대다수 사람들은 차라리 자본주의 대신 신정 국가와 같은 새로운 사회 경제 시스템을 바라는 등 “체제를 전복시키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라. 부와 권력을 소수가 독점해 거의 완벽한 금권사회를 구축했던 로마 제국이 내외부 위기에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떠올려보면, 오늘날 자본주의 역시 번영을 누리고 있다기보다는 누란의 위기에 놓인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구호는 잘못되었다. 제대로 된 구호는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고 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경제 문제는 오직 정치적으로 들여다볼 때에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정치 경제’의 입장을 새삼스레 견지한다. 우리는 시장과 사회, 시장과 정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조정하는 것이야말로 부를 독점하는 소수가 원하는 일이다.
시장은 정치나 사회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이 일하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정치경제적 실천의 산물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가 “일하고 협력하고, 창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개인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쪽으로, 더 바람직하고 공정한 방향으로 시장을 바꿀 수 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다수를 위해 자본주의를 가동할 수 있다.” 정치 경제적 규칙을 재조직해 상위층에 포진한 소수 부자의 정치적 힘을 제한하면서 더 통합적인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샌더스의 지지자답게 저자는 ‘자본주의의 민주화’를 꿈꾼다. “끊임없이 부를 축적해 가는 부유한 소수의 의견에 반응하는 정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빈곤해지고 경제적으로 더 불안정해지는 다수의 필요에 반응하는 정부”를 선택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려면 시장을 지배하는 규칙을 만드는 정치적 힘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로 무장하고 새로운 대항적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통해, 투표로 부유한 이익집단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통제력을 다시 거머쥐어, “현재의 시장 규칙에 있는 부와 힘을 상향 분배 현상을 종식시켜야 한다.”
『자본주의를 구하라』는 저성장과 양극화의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국 경제의 앞날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한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대선을 앞두고 모색이 치열해질 시기에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읽을 만한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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