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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나는 선택하기를 거부한다 ―살만 루슈디의 『이스트, 웨스트』(김송현정 옮김, 문학동네, 2015)를 완독하다


나 역시 목에 밧줄이 감겨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밧줄이 나를 이리저리로 끌어당기고 있다. 동과 서, 그 팽팽한 끈들이 명령한다. 선택하라, 선택하라.

나는 껑충껑충 뛰고, 콧김을 내뿜고, 히힝 울고, 뒷발로 서고, 발길질을 한다. 나는 어떠한 밧줄도 선택하지 않는다. 올가미, 올무, 그중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듣고 있는가? 나는 선택하기를 거부한다. ―살만 루슈디, 「코터」, 『이스트, 웨스트』, 김송현정 옮김(문학동네, 2015), 232쪽


『이스트, 웨스트』를 드디어 완독하다. 작년 가을에 선물로 받아서 조금씩 아껴서 읽던 작품이다. 이 책에 담긴 아홉 소설들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끼여서 정체를 이룩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주로 동양인으로 태어나 그 문화 속에서 정체를 이루고 살다가, 삶의 터전이 서양과 이입되면서 생기는 현실적, 심리적 갈등을 이야기한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쉼표 하나가 박혀서 아프게 그 운명을 상징한다. 루슈디가 『악마의 시』로 인해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1994년에 출간되었기에 쉼표의 상징성이 더욱 커 보인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선택하기를 거부”한다고 하면서 루슈디는 “듣고 있는가”라고 절규한다. 그 대상은 누구일까. 독자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 호세이니일까.

가장 좋은 작품은 「요릭」이다. 『햄릿』에 나오는 어릿광대의 이름이다. 살았을 때는 어린 햄릿을 무등 태워 살아가는 재미를 알려주었고, 죽고 난 후엔 해골로 변해 햄릿에게 삶의 허무한 비의를 깨닫도록 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햄릿의 각성을 위한 하나의 장치로 나올 뿐인 요릭을 전면으로 불러내어 루슈디는 이야기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간다. 루슈디에 따르면, 어떤 위대한 이야기일지라도 이면은 수많은 파도로 갈래져 있기에, 하나의 정체만을 갖지 않는다. 이야기꾼이 어느 물결에 매혹되느냐에 따라서, 하나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우연히 화자의 손에 걸린 독피지 한 장에는 전혀 다른 햄릿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거기엔 오필리아가 엉뚱하게 요릭의 아내로 나온다.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 따위는 없다. 요릭이 목만 남은 해골이 된 이유도, 오필리아가 미쳐버린 이유도, 햄릿의 아버지인 호르벤딜루스가 죽은 이유도 다르다. 루슈디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줄거리를 이루어 어떤 의미를 띄지 않도록, 자유롭게 떠올리고 잊어가면서 파편화된 상태로 내버려둔다. 이로써 이 이야기는 오직 셰익스피어가 불멸하도록 한, 그리하여 같은 줄기로부터 흘러날 수 있었던 모든 비슷한 이야기들의 가능성을 압살한 비극적 햄릿 이야기의 이질적 분기만을 오로지 보여준다. 루슈디는 말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 이야기는 대가 색포 선생의 기록과 다르고, 나는 적어도 위대한 독백 하나를 망쳐놓았다. 변명은 하지 않겠지만, 실상은 이러하다. 이러한 사안은 유구한 세월에 가려져서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니 이야기가 여러 형태로 공존하도록 내버려두자. 선택할 필요는 없다.(95쪽) 


이야기꾼이란 본래 “수탉스럽고 황소스럽다.” 황당무계하다는 뜻이다. 루슈디는 자신이 요릭의 후손으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 매우 적합한”(97쪽) 혈통을 타고났다고 눙친다. 이러한 눙침은 『악마의 시』를 빌미로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호세이니에 대한 풍자이자, 변명이기도 하다. 자신이 믿는 한 이야기의 불멸을 지키려고 현세의 폭력을 앞세운 정치꾼에 대하여 이야기꾼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또 다른 불멸의 이야기를 세우는 것뿐인가. 아아,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모두 정치에서 시작되기 때문”(86쪽)이라는 말이 더욱더 와 닿는다. 자신에게 내려진 죽음의 굴레를 벗기려 했던 한 이야기꾼의 이 거대한 항의를 보라.


지구처럼, 이 고귀한 물질도 오래간다. 영원토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구기거나 찢거나, 찬가위를 사용하거나 튼튼한 치아를 사용하거나, 불쏘시개로 쓰거나 휴지로 쓰거나, 이렇게 인간이 일부러 망가뜨릴 때까지는 존속된다. 진실로 인간은 자신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토양과, 그 물질(종이)을 파괴하는 데 동일한 즐거움을 얻는다. 발밑에 존재하는 토양이 머리 위에 놓이는 순간부터 인간에게 불멸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그 물질을 말이다.(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