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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21세기 고전] (1) 칼의 언어,인생의 허무함을 베다 _ 김훈의 『칼의 노래』

《경향신문》에 한 달에 한 차례 ‘21세기 고전’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 고전’은 2000년 이후 출간된 도서 가운데 다시 곱씹어 읽을 만큼 깊이와 넓이를 지닌 책, ‘이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책을 전문가들이 분야별로 엄선, 주 1회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제가 맡은 부문은 문학 부문입니다. 과학 부문은 김상욱 교수, 인문 부문은 홍순철 대표, 어린이책 부문은 노경실 작가가 맡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정신의 줄을 베고 마음의 실을 끊는 문장이다.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무사(武士)의 문장이다. 단 네 말마디, 한 줄로써 인간의 잔혹함과 자연의 무심함을 포집하는 간결함의 극치다. 작가는 감정을 일절 불어넣지 않았으나 독자 가슴에 거세게 심사를 일으키는 이 문장으로부터 한국문학에 김훈이라는 문턱이 비로소 생겼다.

『칼의 노래』는 2001년에 출간되었다.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국면에서 애독한 일이 알려지면서 밀리언셀러를 이룩했다. 한 사내의 ‘죽을 자리’를 탐구한 이 작품은 어쩌면 그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 21세기의 첫 번째 10년은 『칼의 노래』와 함께 떠오르고 또한 스러진 셈이다.

“간결성, 직핍함, 통렬함”으로 빛을 얹은 김훈의 문장은 “몸으로 느낀 세계의 인상”(황종연)에 제 스스로 홀려 있다. 김훈에게는 인류의 공통 운명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매혹, 즉 “황홀경의 사상”(김윤식)이 없다. 차라리 삶의 완전한 개별성을 선포한다.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부터” 몰려와 수많은 인간들을 제 뜻과 무관하게 죽고 살도록 한 임진 전쟁의 파란만장을 김훈의 인물들은 한 개체로서 겪어낸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김훈은 한 시대의 논리를 한 개인의 감각으로 교체하려 했던 한 세대의 문체미학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이 미학이 문단 내부를 넘어 대중적으로 격렬히 승인받으면서 문장 자체에 대한 강박적 탐구를 하나의 승부처로 삼는 이후의 편향을 생성한다. 정치에 대한 환멸이 허무주의로 떨어지지 않고 “새로운 표현이 있다면 거기에 새로운 정치도 있을 것”이라는 미학-정치를 표어로 채택한, 말 그대로 수사(修辭)가 시대를 풍미한다.

하지만 김훈은 고수다. 이순신을 앞세워 문장으로써, 아니 문장만으로 인생이라는 “이 끝없는 전쟁”의 “무의미”와 싸우는 법을 발굴한다. 칼의 언어를 벼려서 세계의 무의미함, 자연의 무심함, 인생의 허무함을 베려고 한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계를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바란다.

이념의 언어를 거둬내고 정치의 언어를 비켜서서 육체의 언어를 구사한다. 바다가 시체로 덮여 인광이 흐르고 대지가 백골로 가득해 밤에도 어둡지 않은 참담함 속에서도 끼니가 되면 배가 고프고, 이성을 만나면 욕정이 일어서고, 짬만 나면 오일장이 열린다. 술을 빚어 노래가 우렁차고 여자들 배가 부풀어 오른다. 이 속수무책의 건강성을 무심히 기록하여 전하는 밥의 언어, 살의 언어, 장터의 언어가 가슴이 내려앉을 만큼 저리고 또한 정신이 아득할 만큼 무참하다.

“새벽 바다의 안개 비린내 속에서 (중략) 죽은 여진의 몸 냄새를 생각했다. 살아 있는 목숨의 냄새는 비리고 숨 막혔다. (중략) 냄새는 싸움과 평화의 구분을 넘어서서 살아 있었다.”

노량 바다에서 이순신이 스스로 허락한 죽음을 죽을 때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도 “살아 있는 목숨의 냄새”였다. 아들의 젖 냄새, 백두산 새벽안개 냄새, 여진의 몸 냄새…. “산 것이 산 것을 불러” 육체의 공동체, 감각의 연대를 이루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전투에서 노을처럼 스러지더라도 그 죽음은 전사가 아니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일상적인, 애도가 있을 수 없는 자연사일 것이다.

국가 파산과 함께 찾아온 21세기가 무엇보다 생존에 몸부림치는 연대가 될 것을 예감한 것일까. 『칼의 노래』는 슬픔과 고통이 포만한 세상일지라도, 육체가 기록하고 기억하는 실감이 있는 한 인생은 괜찮다고, 그러니 삶에서 죽음을 허락하지 말라고 주문을 걸어준다. 그 간결하고 견고한 언어를 함께 나누고 싶다.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있으라.”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