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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또 읽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 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213쪽)



저녁에 노원인생학교 강의를 앞두고 어제 하루 종일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다시 읽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 찢어지는 슬픔과 울화가 맺혀 가시지 않았다. 화해가 아직 있을 수 없고 승화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유려한 문장으로도 간신히 그 어눌함과 말더듬을 표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만신창이가 된 감정을 이끌고 여기까지 우리 문학을 끌어올린 한강에게 깊은 연민과 함께 벅찬 고마움을 느낀다. 

왜 소년일까? 버젓이 이름은 있다. 그러나 이름이 있는데도 그저 소년이라고 보통명사로 표시됨으로써 이 소년은 누구나,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도청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그 소년이 아니라 그 역사를 같이 살아갔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아니 앞으로 올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인류 전체로 변신한다. 정관사가 아니라 부정관사로서의 존재, 자기 육체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옮겨 붙을 수 있는 유령이 되었다. 어디서나 출몰해서, 입 없이 벙긋대는,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무당이 되어 입을 빌려주어야 하는 영혼으로 되었다. 

‘이’라는 조사는 이 부정성을 더욱 강화한다. 만약 ‘소년은’이라고 표기되었다면, 그 소년을 두드러지게 했을 것이고, 느낌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한강은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와 ‘은’의 정교한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기록하는 것은 이 정도까지 단어의 미세함을 자유롭게 놀리지 않고는 가능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온다’라는 현재형도 흥미롭다. 장소의 이동이자 시간의 이동이다. 장소라면 광주에서 세상 모든 곳으로, 시간이라면 과거에서 현재로 ‘소년’이 출현한다는 뜻이다. 이는 역사적 사건의 복귀이면서 영원한 현재화이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생령들의 이야기를 공간의 속박과 시간의 풍화를 견딜 수 있도록, ‘희생의 형식’이 아니라 ‘영생의 형식’으로 기록하는 문학의 방법론을 한강은 찾아내 버린 것이다. 이야말로 문학의 고유한 역동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