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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초연결시대의 출판과 편집 (경향신문 기사)


2015 파주국제출판포럼


10월 초에 파주국제출판포럼에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미래의 편집’이 주제였죠. 저는 여기에서 ‘연결로서의 편집’이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질문 시간에 철수와영희 박정훈 대표가 “언론, 서점의 도움을 받아 책을 팔아왔던 것은 자본을 가진 출판사일 뿐, 소출판사들은 그동안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지금 위기에 빠진 것은 거기에 의존해 왔던 대자본 출판사일 뿐이다. 소출판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책을 낼 뿐이다. 따라서 출판 산업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출판 문화를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흥미롭고 중요한 발언입니다. 

그러나 ‘대출판사’와 마찬가지로 ‘소출판사’ 역시 ‘저자와 독자’ ‘쓰기와 읽기’ ‘책과 독자’를 연결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대소 출판사를 위한 연결 모델이 각각 존재한다면, 출판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비즈니스 모델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출판 다양성을 마련하기 위한 긍정적 신호인 것이고, 적극적으로 연구해 볼 만한 과제입니다. 

어쨌든, 박 대표가 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철수와영희도 컸든 작았든 서점과 언론의 도움 없이 절대로 지금까지 꾸려올 수 없었을 겁니다. 설령 수사의 차원에서도 이들의 역할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장기적으로 함께 책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을 꾸준히 도모해야 합니다. 어쨌든 출판은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어떤 책도 ‘저절로’ 독자에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출판은 좋은 일을 하는 고고한 ‘선비 짓’이고, 언론이나 서점은 돈에 사무친 ‘업자’로 보는 시각은 조금 곤란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책은 ‘언론’이나 ‘서점’을 통해서는 ‘충분히’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출판은 ‘서점 연결’이나 ‘언론 연결’을 넘어서는 거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고, 거기에서 편집자가 새로운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책 문화에서 출판은 계속 힘이 약해질 것입니다. 책 문화가 출판 문화는 아닙니다. 책은 현재와 같은 형태의 출판 없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깊은 숙고가 필요합니다.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가 포럼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저자와 독자를 잇는 플랫폼 출판 전부터 확보해 나가야”


파주 ‘국제출판포럼’ 새 시대의 출판 논의

전통적인 종이책 독서 인구는 줄어들고, 스마트폰을 통한 뉴미디어 사용자는 급증한다. 출판의 위기 혹은 격변기를 맞아 출판계는 무엇을 해야 할까.

5~6일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리는 제10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은 변화하는 출판의 양상을 논하는 자리다. 특히 전통적으로 출판의 핵심이었던 편집자들이 맡아야 할 새로운 역할을 제시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미리 공개된 주제발표문에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저자-출판사-언론-서점으로 이어진 출판의 카르텔이 무너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전통적으로 출판사는 저자가 직접 접촉하기 힘든 언론, 서점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을 확보함으로써 안정적인 부가가치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모바일 혁명으로 저자의 힘이 강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저자가 팟캐스트 등의 통로를 통해 출판사를 제치고 독자와 직접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은 저자가 팟캐스트로 인기를 얻은 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대표적 사례다. 앞으론 저자가 출판사를 제치고 직접 출판에 뛰어들고, 서점 역시 저자와 직접 관계를 맺는 모델이 나올 수도 있다.

장 대표는 출판사가 서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전체 단행본 서적 매출의 70%가 교보문고, 예스24 등 소수 대형서점에 집중돼 있기에, 이 서점에서 외면받는다면 아무리 좋은 책도 독자에게 가닿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사는 “독자와 책을 잇는 새로운 연결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이책을 출판한 다음에 이를 유통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출판 이전부터 저자와 독자를 잇는 플랫폼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일본 추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의 <철학의 역사> 시리즈(총12권)는 평균 정가 3600엔(약 3만5000원)으로 싸지 않은 가격이지만, 인문서의 위상 축소 속에 권당 평균 7000부가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 군지 노리오 학예국장은 <철학의 역사>가 독자들에게 ‘쓸모있는 책’이라는 인식을 줬다는 점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쓸모있는 철학서’라고 하면 통상 삶의 양분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철학의 역사>의 쓸모는 조금 달랐다. 독자들이 이 책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철학의 역사>는 사소한 인용에도 출처를 모두 표시해 독자가 원전을 찾을 수 있도록 했고, 중요 개념·문구는 가능한 한 원문을 병기했다. 또 ‘참고문헌’을 서지사항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집필자들이 참고문헌에 대한 코멘트까지 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일각에선 스마트폰에만 의존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멍청한 세대’가 될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그러나 혁신적 기술은 언제나 기존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저항을 받아왔다.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달을 경멸했고, 종교인들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비난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전 시대의 출판이 사상적·종교적·정치적 탄압을 받고 이를 이겨내 왔다면, 21세기의 출판은 과학기술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봤다. 그는 “앞으로의 출판은 정치적·종교적 투쟁을 벌이기보다는 기술의 효용적 개선을 선도하면서 글쓰기와 글 읽기의 변화에 대한 대응에 적극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인들 역시 정치적 저항에 투입했던 용기를 디지털 문명 시대에 맞게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