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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이몽양(李夢陽)의 새로 지은 산장에서 저절로 흥이 일어(新莊漫興)

새로 지은 산장에서 저절로 흥이 일어


이몽양(李夢陽, 1475~1529)


지난번 왔을 때에는 살구꽃이 붉었는데,

이번에 오니 멀구슬꽃이 빨가네.

꽃이 피고 또 꽃이 피나니,

고요히 앉아 세월 가는 것을 보누나.


新莊漫興


昨來杏花紅,

今來楝花赤.

一花復一花,

坐見歲年易.



멀구슬나무꽃



이몽양은 명나라 때의 시인으로 호를 공동자(空同子)라고 했습니다. 열여섯 살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관직을 얻었으나, 절개를 앞세운 과격한 행동 탓에 세 번이나 옥고를 치르는 등 불우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문학에서는 전칠자(前七子)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다른 이들과 함께 “한나라 이후에는 문장이 없고, 당나라 이후에는 시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복고적 문학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절에 맞는 정서가 있고 언어가 있는 법인데, 지금 보면 어떻게 이러한 주장이 통용될 수 있을까 싶지만, 시의 격조를 중시하는 ‘격조설(格調說)’이 문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덕분에 거의 100년 동안이나 위세를 떨쳤습니다. 물론 모의표절(模擬剽竊)이라는 격렬한 비난도 받았습니다.

제목에 나오는 ‘만흥(漫興)’은 ‘저절로 흥이 일어서 시를 쓰고 싶을 만큼 넘쳐흘렀다’는 뜻입니다. 산속에 작은 별장을 마련한 후, 오가면서 꽃이 피고 지고 또 피는 광경을 지켜보는 흥취를 그려낸 시입니다. 시는 담백하기 그지없어서 덧붙일 말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첫 구절에 나오는 ‘작(昨)’은 보통 ‘어제’로 새기지만, 여기에서는 ‘지난번’이라는 뜻입니다. ‘행화(杏花)’는 살구꽃으로 보통 4월에 연분홍 꽃이 핍니다. 하지만 살구꽃은 붉은빛이 선명하지 않으므로 홍매(紅梅)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둘째 구절의 ‘연화(楝花)’는 흔히 연화(練花)라고 쓰기도 하는데, 흔히 멀구슬나무 꽃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멀구슬나무 꽃은 시에 묘사된 것처럼 붉은색이 아니라 흰색과 보라색의 중간쯤 되는 빛깔을 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꽃은 사실 ‘명자나무 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자꽃은 살구꽃에 비해 아주 선명하게 붉으므로 그렇게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시에서 색감이란 정확하게 자연의 색을 재현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시에 적힌 대로 보아도 좋습니다.

셋째 구절은 꽃 하나가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고, 그 자리를 다른 꽃이 메워 온 산을 물들이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배부일배(一杯復一杯, 한 잔 또 한 잔)’처럼 어떤 일이 반복될 때 흔히 볼 수 있는 문장 구조입니다. 꽃이 피고 지고 또 피는 광경을 담담히 묘사했습니다. 당시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이몽양답게 당시풍을 확연하게 보여 주네요.

넷째 구절은 시인이 산 속 집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속되지 않게 드러냅니다. ‘세년(歲年)’은 세월이라는 뜻이고, ‘易’은 ‘쉽다’는 뜻일 때에는 ‘이’로, 여기에서처럼 ‘바뀌다’라는 뜻일 때에는 ‘역’으로 읽습니다. 격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세월이 헛되이 흘러감을 살며시 아쉬워하는 무상(無常)의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담담하여 격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