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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정섭(鄭燮)의 가파른 절벽에 난초가 피다(峭壁蘭)

가파른 절벽에 난초가 피다


정섭(鄭燮)


가파른 절벽은 높이가 일천 척인데,

난초꽃이 푸른 하늘에 걸려 있네.

절벽 아래 캐려는 나무꾼이 있어서

손을 뻗었으나 꺾을 수는 없었네.


峭壁蘭

峭壁一千尺, 

蘭花在空碧.

下有采樵人,

伸手折不得.

흥선대원군의 묵란도

정섭(鄭燮, 1693~1766)은 청나라 강희제 때의 시인이자 화가입니다. 양주팔괴(楊州八怪)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벼슬을 떠나 글과 그림을 벗해서 자유롭게 살고자 후원자를 찾아 양주에 정착했습니다. 화훼 그림에 뛰어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을 한 폭에 같이 넣어서 조화를 추구하려 했습니다. 특히 난초 그림과 대나무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난주에는 같이 석류꽃을 공부했는데, 여름 꽃이라면 역시 난초꽃이기에 골라 보았습니다. 제목 초벽란(峭壁蘭)에서 ‘초(峭)’는 가파르다는 뜻입니다. 초벽(峭壁)은 수직으로 치솟아 무척 가파른 절벽입니다. 난초는 높은 절벽에 자리 잡고 세속에서 멀어진 곳에서 피기에 예부터 선비들의 고고한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사랑받았습니다. 홍동 마을에도 난초꽃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첫 구절 “초벽일천척(峭壁一千尺)”에서 척(尺)은 동양에서 쓰이던 길이 단위로 시대에 따라 길이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본래 손을 펼쳐서 물건의 길이를 잰 데에서 온 글자로,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 길이입니다. 처음에는 약 18센티미터였다가, 한나라 때에는 약 23센티미터, 당나라 때에는 약 24.5센티미터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30센티미터 길이로 쓰였습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일천 척은 절벽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이 구절은 난초가 핀 절벽의 험준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세상사의 험난함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둘째 구절 “난화재공벽(蘭花在空碧)”에서 ‘공벽(空碧)’은 푸른 하늘을 뜻합니다. 절벽에 피어난 난초꽃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난 것처럼 보이기에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눈을 감고 잠시 떠올려 보면 까마득히 높이 솟은 검은 절벽을 배경으로 푸른 하늘과 붉은 난초꽃이 대비되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선연하게 들어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셋째 구절 “하유채초인(下有采樵人)”에서 ‘초인(樵人)’은 나무꾼입니다. 나무하러 오던 길에 난초를 발견하고, 그 고움을 탐하여 뿌리째 캐서 옮겨 심거나 가져다 팔려고 합니다. 선비가 맑은 곳에 숨었다고 해서 세상이 그냥 내버려두진 않습니다. 그 고고함을 깎아내리려는 시련이 한없이 계속되는 것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넷째 구절 “신수절부득(伸手折不得)”에서 ‘신수(伸手)’은 손을 쭉 내뻗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닿지 않아서 꺾을 수는 없습니다. 온갖 유혹과 시련에도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절개를 역동적으로 잘 그려냈습니다.


이 시에서는 풍진에서 멀어져 절벽에 홀로 핀 난초의 고결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이를 기어이 꺾으려는 나무꾼의 탐욕스러움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자연을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음이 오늘날 지구 자체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무차별적 파괴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선비의 고고함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