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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시

[시골마을에서 한시를 읽다] 상건(常建)의 왕창령이 숨어 살던 곳에 묵으면서[宿王昌齡隱居]



왕창령이 숨어 살던 곳에 묵으면서


상건(常建)


맑은 시내는 깊어서 잴 수가 없는데,

숨어 살던 곳에는 오직 외로운 구름뿐.

소나무 가지에 걸린 초승달,

맑은 빛은 아직도 그대를 위해 비추네.


宿王昌齡隱居

淸溪深不測,

隱處唯孤雲.

松際露微月,

淸光猶爲君.




상건(常建, 708~765?)은 성당(盛唐) 때의 시인입니다. 예전에 같이 공부했지만, 당시(唐詩)는 크게 초당(初唐), 성당,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시기가 구분됩니다. 이른 절정을 맞고 그 여파가 오래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당 때에는 이백과 두보가 활약하면서 시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상건도 그 무렵의 시인입니다. 

왕창령(王昌齡, 698~765?) 역시 성당 때의 뛰어난 시인입니다. 상건보다 열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개원(開元) 15년(727년) 같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서로 뜻이 맞아서 친구로 지냈다고 합니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상건은 금세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은퇴해 산속에 묻혀 살았지만, 왕창령은 벼슬길을 죽는 날까지 위태롭게나마 지켰습니다. 이 시는 왕창령이 출사하기 전에 숨어 살던 집에 상건이 찾아가서 지내면서 왕창령에게 부질없이 세상을 탐하지 말고 물러나 자신과 함께 유유자적할 것을 권하는 시입니다. 세속을 초월해 지내려는 뜻이 맑고 깨끗해서 이미 상건이 살아 있을 때 널리 알려졌습니다. 

숙(宿)은 자다, 묵다 등의 뜻입니다. 제목은 왕창령이 예전에 숨어 살던 집에 머물면서 지었다는 뜻입니다. 

첫 구절은 물이 맑디맑은데, 들여다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습니다. 이 구절은 왕창령의 정신이 맑고 깨끗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둘째 구절의 ‘은처(隱處)’는 ‘은거(隱居)’라고 쓰인 책도 많습니다. 어느 쪽이나 ‘숨어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唯)은 ‘오직 ~뿐’이라는 말입니다. 외로운 구름[孤雲]은 친구가 떠난 곳에 홀로 와 있는 상건 자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속세를 떠나서 외로운 구름처럼 살아갔던 젊은 날의 왕창령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은자의 고독하면서도 높은 경지를 드러내는 뜻이 있습니다.

셋째 구절의 ‘소나무[松]’ 역시 날씨가 추워진 후에도 푸름을 잃지 않으므로 전통적으로 선비의 고결한 정신을 상징하는 사물입니다. ‘송제(松際)’는 소나무 가장자리, 즉 소나무의 가지 끝을 가리킵니다. ‘로(露)’는 명사로 쓰일 때에는 ‘이슬’이라는 뜻이지만, 동사로 쓰일 때에는 ‘드러내다’ ‘폭로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동사로 쓰여서 ‘달이 소나무 가지에 모습을 드러내 걸려 있다’는 뜻입니다. ‘미월(微月)’은 초승달입니다. ‘손톱 달’같이 재치 있게 옮겨도 좋습니다. 

넷째 구절의 ‘청광(淸光)’은 맑은 빛이라는 뜻인데, 역시 숨어 사는 선비의 맑은 정신을 드러냅니다. ‘유(猶)’는 ‘오히려’ ‘마치 ~와 같다’ 등으로 많이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지금도 역시’ ‘아직도’라는 뜻입니다. ‘위군(爲君)’은 ‘그대를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 시는 왕창령은 이곳에 없지만, 그가 벗 삼던 맑은 물, 깨끗한 구름, 푸른 소나무, 깨끗한 달빛은 그대로 있음을 담담하게 그려 냄으로써, 왕창령의 고매한 정신을 높이 기림과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왕창령이 빨리 세속을 떠나서 이 좋은 곳에서 자신과 함께 어울려 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산수은일시(山水隱逸詩)’의 최고 절창 중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