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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표(表), 보(保), 경(輕), 탐(探), 참(參) ―‘예스24, 2015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분석 및 도서판매 동향 발표’로 본 독서 트렌드

표(表), 보(保), 경(輕), 탐(探), 참(參)

‘예스24, 2015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분석 및 도서판매 동향 발표’로 본 독서 트렌드


올해 상반기 예스24 판매 순위가 어제 발표되었다. 단순한 베스트셀러 트렌드 분석은 편집자로서 별 시사점을 얻을 수 없기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편집자는 ‘미래의 문헌학자’로 살아야 한다. 그는 미리 예측하는 자이지 뒤늦게 쫓아가는 자가 아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외에는 독자들의 밑바닥 움직임을 읽을 수 있는 별다른 계기가 없기도 하므로 여기에 리스트를 본 소감을 간략히 적어둔다. 사실 이 글은 KBS ‘TV 책을 보다’ 자문회의 때 발표했던 것을 짧게 정리한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흔히 ‘용기’ ‘불안’과 같은 독자 심리학으로 분석하지만, 나는 늘 그런 읽기 방식을 재미없어 했다. 지나치게 표층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심리란 존재의 결과다. 그 존재는 어떻게 생겼을까? 손 안에 든 컴퓨터 탓에 온갖 미디어에 사방으로 연결된 채 끊임없이 정보를 읽고 소비하는 존재다. 발신과 수신, 수용과 반응이 한없이 반복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와 책이 다량으로 만나는 접점이 바로 베스트셀러 또는 화제작이다. 이를 고려해서 상반기 독서 경향을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 한자말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표(表). 글쓰기나 말하기 책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래리 킹의 『대화의 신』(강서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이나 유시민의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생각의길, 2015)이 신간으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으며, 그 밖에도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 등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강연 시장에도 글쓰기와 말하기 열풍이 불고 있어서, 정보의 수용자인 대중으로서 사는 데 머무를 수 없고 정보의 창발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표현 강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셜미디어란 궁극적으로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는 대가로 다른 사람의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만큼 ‘표현’에 대한 열망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조애너 베스포드의 『비밀의 정원』(클, 2014) 역시 액티비티를 통한 힐링이라기보다는 색칠한 그림의 공유를 통한 자기표현 욕구가 훨씬 중요한 성공요인이라는 점에서 넓게 보아 같은 맥락에 포괄된다.

둘째, 보(保). 그물처럼 둘러싸고 끊임없이 자기 고백을 강요하는 투명사회의 도래는 반대로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을 낳았다.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 받을 용기』(전경아 옮김, 인플루엔셜, 2014), 이케다 다이사쿠의 『지지 않는 청춘』(조선뉴스프레스, 2015), 한비야의 『1그램의 용기』(푸른숲, 2015) 등은 한없이 연약해진 자아의 겉면을 호두껍데기처럼 단단히 다져보려는 안타까운 몸짓을 드러낸다. 자신을 노출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켜야 하는 이 분열 상태가 얼마만큼이나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진짜 자아를 지키는 것은 심리학이 아니라 존재론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사회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셋째, 경(輕). 호두처럼 단단하기를 원하지만 사실 곶감처럼 말랑말랑한 자아의 겉껍질을 여물게 하는 힘에 대한 갈망도 꾸준하다.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 2014)는 출판계에서 꾸준히 영향을 키워온 소셜 인플루엔서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동시에 무거운 인문학 지식을 짧은 시간에 가볍게 소화할 수 있는 ‘짬짜미 지식’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려고 하는 ‘스낵 컬처’ 현상을 드러낸다. 내면의 더께를 쌓아줄 고급지식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그에 대한 시간이나 노력을 기울일 만한 여유는 결코 없는 상황(현재 콘텐츠 기업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만큼 점유하느냐를 두고 경쟁 중이다. 따라서 개별 콘텐츠 시장의 점유율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출판의 경우, 한 사람의 전체 인생에서 책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차지하느냐를 두고 다른 콘텐츠 기업과 싸우는 중이다.)에서 사람들은 정보의 밀도가 높은 강연으로 몰리고 또 정보 공학적으로 압축 설계된 책들에 몰리는 것이다. 김선현의 『그림의 힘』(에이트포인트, 2015)이나 박광수의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걷는나무, 2014) 등도 이 계열로 볼 수 있다. 끝없는 노출로 허약해지고 비어가는 자아를 이 책들로는 좀처럼 채우기 어렵겠지만, 비슷한 책을 순례하는 수평운동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책으로 옮겨가는 수직운동의 도약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넷째, 탐(探). 베스트셀러에는 들지 못했지만, 과학책에 대한 독자들의 주목도가 높아지는 것도 감지된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고, 과학에 대한 일정한 이해 없이는 시민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다. 메르스 같은 경우만 해도 바이러스나 감염에 대한 과학적 기본 지식 없이는 사태를 올바로 파악할 수 없고 자칫하면 공포와 혼란을 전달하는 숙주가 될 뿐이다. 대니얼 대닛의 『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노승영 옮김, 동아시아, 2015), 아톨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김희정 옮김, 부키, 2015), 랜들 먼로의 『위험한 과학책』(이지연 옮김, 시공사, 2015) 등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무엇보다도 해외 과학잡지의 한국어판인 《한국 스켑틱》(바다출판사, 2015)이 폭발적 반응을 일으킨 것도 주목할 만하다.

다섯째, 참(參). 비록 우리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즐겁게 살아갈지라도 결국 실제로 우리는 입고 먹고 자야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현실에 대한 깊은 참여를 촉발하는 책들을 많이 읽어준 것은 이 덕분이고 생각한다.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의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2015), 김애란 외의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 등 현실과 접점을 만들고 변혁의 성찰을 불어넣으려 하는 시도가 끊이지 않은 것은 한국출판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한다』(김명남 옮김, 창비, 2015), 미겔 앙헬 캄포도니코의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송병선 옮김, 21세기북스, 2015) 등도 책으로 현실을 바꾸어 보려는 뜻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할 만하다.

사실 이 발표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문학이 안 팔리느니, 인문 실용서(?)가 약진했느니 하는 게 아니다. 독서 인구가 새로 만들어지지 않고 점점 늙어간다는 현실이다. 구매 권수 중 20대의 비중은 2014년 14.5%에서 상반기 13.2%로 남녀 모두 줄어들었으며, 10대 역시 미미하게나마 감소했다. 독서를 떠받치는 미래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출판계 누구도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이 세대에게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담론을 개발해 공급하는 것은 열일 제쳐두고 지금 출판이 할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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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yes24.com/Article/View/28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