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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출판을 생각하다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다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

새벽에 상반기 출판 상황에 대한 글을 쓰다가 문득 나쓰메 소세키의 말이 떠올랐다.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에서 마주친 구절이다. 수첩에 슬쩍 적어두었는데, 메모해 둔 자료를 뒤적이다가 중간에 툭 튀어나온 것이다. 얼어붙은 듯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사는 것은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질문의 형태로 내 삶에 출몰하는 세상사를 ‘뼛속까지 내려가서’ 마주하는 것은 어렵다. 햄릿의 대사처럼 세계의 사개가 물러나 있고 이를 바로잡을 운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 막중한 임무를 외면하고 싶지 않은 이는 누구이겠는가. 

지난주 기획회의에 “편집 전략이란 무엇인가요?”라는 글을 보낸 후, 후배 한 사람이 답장을 보내왔다. “편집자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하던 대로만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건 경영의 몫이 아닐까? 일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어떤 고민을 하는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편집 전략은 확실히 편집자의 일이지만, 편집자에게 편집 전략을 어떻게 수행하게 할 것인가는 출판 경영자의 몫이다. 현재의 출판 상황에 대한 출판 경영 쪽의 인지부조화 또는 기능부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그러나 세계의 사개가 물러나 있을 때에는 ‘일개 편집자’라 할지라도 움직여야 한다. 회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하는 일의 가치를 세상에 붙들어 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놈의 회사는 망해 버릴지라도, 그때 그 자리에서 내가 만든 책, 내가 거기에 투여한 시간 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사라져서는 안 된다. 

올 상반기의 출판이 우리에게 증명한 것은 기존의 루트만으로 책은 충분히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받아든 성적표는 전반적으로 처참하다. 출판과 같은 제조업이나 유통업에서 매출이 줄고 영업이익이 늘어서 흑자를 냈다는 것은 ‘가혹한 구조조정’의 결과이자 예감일 뿐이다. 거기다 대안적인 읽기 비즈니스가 모바일 화면을 진지로 삼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출판 시장 내의 점유율은 아무 소용도 없다. 대체제가 널려 있는 상황에서 매출이 줄어든 흑자라는 것은 임시변통일 뿐 큰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조만간 매출이 줄어든 적자가 닥쳐올 테니까 말이다.

이제 출판은 책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하는 무거운 임무를 지게 되었다. 완전 도서정가제를 실시해서 서점을 그나마 정상화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지만, 그렇다고 이 임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임무를 수행할 시간을 벌기 위해 완전 도서정가제를 실시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좋은 해결책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 해결책일 수 없다는 뜻이다.

솔직히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서로 임무를 맡지 않으려고 출판사와 서점이 폭탄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호흡 긴 콘텐츠를 읽어 주는 독자를 생산하지 않는 한, 비독자를 독자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출판 산업은 어떠한 경우에도 회생할 수 없다. 생산 쪽이 아니라 연결 쪽에 모든 역량을 쏟아도 부족하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 과연 이러한 임무를 누가 질 것인가. 이 질문 가까이 출판의 진지함이 놓여 있다. 오늘날 출판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쓰메 소세키가 묻는다.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