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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편집은 책을 어떻게 바꾸는가

마쓰오카 세이고의 『독서의 신』(김정균 옮김, 추수밭, 2013)을 읽으면서 떠올린 생각



마쓰오카 세이고는 나의 편집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이다. 나는 그가 쓴 『지식의 편집』(변은숙 옮김, 이학사, 2004)을 통해 비로소 편집적 사고 방법을 익혔고, 간신히 편집의 기술에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나의 편집이 감각적이고 본능적이고 비체계적인 편집이었다면, 마쓰오카 학교에 입교한 이후에는 이성적, 구조적 편집으로 서서히 옮기게 되었다. 

그물코출판사의 김수진 편집장한테 내가 『지식의 편집』을 읽어 보라고 권한 후, 내친 김에 한국어로 번역된 마쓰오카의 책을 모두 구입해서 함께 읽고 있다. 이 책은 『지(知)의 편집공학』(박광순 옮김, 지식의숲, 2006), 『만들어진 나라 일본』(이언숙 옮김, 웅진, 2008)과 함께 구입한 것이다. 『지의 편집공학』은 이미 오래전에 읽었고, 『만들어진 나라 일본』은 ‘독서의 신’ 마쓰오카가 쓴 고급한 일본 문화론이기에 가볍게 『독서의 신』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읽자마자 곧 이 책이 예전에 읽었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2010)의 개정판임을 알았다. 마쓰오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쯤 그의 책을 더 읽어도 어떠랴 싶어서 오늘은 하루 종일 『독서의 신』을 읽었다. 그리고 편집자가 무엇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책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아래에 떠오른 생각들을 서평 대신 기록해 둔다.

두 책은 내용에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지만 ‘마쓰오카 세이고의 책과 독서와 편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독서의 신』이 가벼운 인문서 스타일로 편집되었다면, 예전에 나왔던 책은 실용서 스타일에 가깝게 편집되었다. 그 결과 내용은 같지만, 전혀 느낌이 다른 두 권의 책이 나와 버렸다.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같은 책이 여러 편집자의 손을 타면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판본 비교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다.

두 책의 띠지는 각각 편집자의 의도를 뚜렷하게 반영한다.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띠지에는 “‘독서의 신’ 마쓰오카 세이고가 전수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식 독서법”이라고 적혀 있고, 『독서의 신』의 띠지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빨아들이는 독서 고수의 독서법 대공개. ‘책은 어떻게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가?’”라고 적혀 있다. ‘독서의 신’이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2010년에도 있었던 셈이지만, 그때는 마쓰오카식 다독술을 통한 ‘지식의 습득’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2013년에는 ‘책과 인생의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 ‘실용의 시대’는 저물고 ‘인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일까. 이 마음의 움직임이 대단히 흥미롭다. 

가령, 두 책의 3장 차례만 서로 비교해 보아도 이 책들은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일 정도이다.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3장은 다음과 같다. “3장. 다독술을 위한 기초 체력 다지기 / 독서의 운명은 첫 3분에 결정된다 - 차례 독서법 / 진정한 독서는 ‘방법으로서 독서’이다 / 책은 텍스트가 들어 있는 노트다 - 표시 독서법 / 저자의 글쓰기 모델을 찾아라 - 독해력 단련법”. 반면에 『독서의 신』의 3장 차례는 다음과 같다. “3장 즐거운 독서는 어떻게 가능한가 / 전희를 충분히 즐겨라 / 모두를 위한 독서법은 잊어라 / 반드시 필기도구를 지참하라 / 저자 특유의 글쓰기 모델을 찾아라”. 같은 내용이라도 편집에 따라 이렇게 들어가는 입구가 ‘다독술’과 ‘즐거운 독서’로 완벽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편집일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에 실려 있던 특별 대담 「종횡무진 넘나드는 편집적 책읽기의 힘」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독서의 신』에서는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본래 ‘옮긴이 서문’의 제목이었던 ‘세상 모든 지식을 빨아들이는 세이고식 책읽기’ 대신에 ‘옮긴이 서문’의 제목으로 옮겼지만, 「일러두기」에 미처 손대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흔적만 남긴 채 그 내용은 책에서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이라면 온라인에서라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면 어떨까 싶다.(그러고 보면 초판의 ‘옮긴이 서문’ 제목은 개정판 띠지 쪽으로 옮겨졌다. 편집은 역시 배치와 재배치다. 재활용 정신이 무척 돋보인다.)

이 책에서 마쓰오카 세이고는 ‘편집적 독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편집적 독서란, “저자가 만들어 놓은 ‘글쓰기 모델’을 향해, 독자가 마침 가지고 있는 자신의 편집 모델을 올가미처럼 던져 넣고, 그곳에서 ‘읽기 모델’을 걸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나가는 행위”이다. 이는 “한 권의 책을 만나고 독서를 하는 행위는 거대한 역사가 지속해 오면서 전해 준 ‘의미의 시장’에서 이러한 체험을 재현하고 재생하고 또다시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독서란 저자가 발신하는 것들을 단순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축적해 온 ‘의미의 시장’을 배경으로 독자와 저자가 격렬하게 섞이면서 상호 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이를 위한 촉매인 것이다. 

마쓰오카 세이고는 매일 한 권의 책을 다시 읽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서평을 올리는 ‘천야천독(千夜千讀)’ 프로그램을 7년 동안이나 계속해 왔다. 그것도 짧은 감상 글이 아니라 제법 두툼한 분량의 제대로 된 리뷰에 가까운 글이다. 오늘 접속해 보니 1559일째 밤의 글이 올라와 있다. 『아질의 일본사』라는 책에 대한 서평이다. 아질은 삼한의 소도 같은 곳으로 범죄자 등이 도망쳐서 숨는 순간 죄가 면제되는 신성한 공간이다. ‘독서의 신’이라는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거대한 개인 기획에 무한한 경이와 함께 곁에서 조용히 따라서 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존경한다.



======== 밑줄들 =========


독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읽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쪽)

책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 온 미디어입니다. (중략) 이 세상에 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지 않을까요? (18쪽)

나열된 책등을 보는 순간 이미 ‘읽기’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20쪽)

책은 두 번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과 별도로 언제, 어떤 기분으로, 어떤 감수성으로 읽었는지 등이 독서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칩니다. (중략) 그 책에 대해, ‘오늘, 바로 지금’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읽던 당시의 감상을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돌아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시선이야말로 독서력에 필요하고, 그러한 시선을 가지기 위해서 그 책을 ‘오늘의 시점’에서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26쪽)

중요한 점은 ‘독서는 엄청난 행위’라고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서도 어느 정도는 육체적이고 어느 정도는 정신적인, 일상의 행위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것, 단지 그것뿐입니다. (35쪽)

편집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책과 사람’의 연결 고리에 실제로 들어와서 보니 역시나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4쪽)

책에는 수많은 ‘사람의 드나듦’이 있다. (51쪽)

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배우고 싶은 사람의 책은 반드시 읽습니다. 이것도 다독의 요령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68쪽)

독서는 ‘조감력’(전체를 한눈으로 관찰하는 능력)과 ‘미시력’(작은 부분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관찰력)이 교차하는 실험입니다. (68쪽)

‘장소’를 묘사할 때 그 장소를 사고나 표현의 바탕으로 삼으면 이중 진행이 가능하다. (73쪽)

원래 독서란 것에는 마조히즘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못 걸렸다’라든가 ‘헛스윙 삼진 아웃’을 당했다 해도 모두가 매우 소중한 경험입니다. 아는 척하고 읽는 것보다는 완봉패를 당하거나 모자를 벗어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돌고 돌아가면서 조금씩 독서력을 길러 나가는 길입니다. (86쪽)

개인 전집에서는 한 명의 저자가 다양한 투구 유형과 구종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구조적인 독서를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명의 저자, 사상가, 학자, 작가가 쓴 전집을 읽고 나면 그 어떤 곳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밀도’ ‘집중력’ ‘언어력’ ‘사고력’이 매핑(mapping)됩니다. 이것이 단행본과 다른 점으로, 전집에서는 한 사람의 작가가 연속적이고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87쪽)

책은 판도라 상자입니다. 독서란 그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이지요. 그 상자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내 앞으로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폴 발레리 식으로 말하자면, 독서를 하면서 “천둥소리 한 방을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 뜻은 이쪽이 무지하기 때문에 독서가 재미있다는 것으로, 그것이 끝입니다. 무지(無知)에서 미지(未知)로, 그것이 독서의 참다운 묘미입니다. (99쪽)

일반적으로 차례는 2~4쪽에 불과합니다. 먼저 이것을 제대로 읽어야만 합니다. 사실 저는 서점에서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기 전에 반드시 차례를 먼저 읽습니다. (중략) 겨우 1분에서 3분에 불과한 시간입니다만, 이 3분 정도의 짧은 순간에 차례를 읽어 두었는지 아닌지가 그 뒤의 독서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중략) 이것은 제가 ‘차례 독서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입니다. (중략) ‘차례 독서’는 (중략) 반드시 필요한 ‘전희’입니다. (중략) 이 3분 동안의 ‘차례 독서’가 자신과 책 사이에 부드러운 ‘감촉 구조물’ 같은 것을 쌓아 올립니다. 혹은 부드러운 ‘지식의 지도’라고 부를 만한 것이, 비록 약간이긴 하지만, 생겨나는 것이지요. (101쪽)

책은 저자가 쓴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가 책에 담은 사상이나, 저자가 택한 서술 방법, 단어에는 분명 우리 독자의 수용 능력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한계가 어느 정도 있기 마련입니다. (104쪽)

독서는 누군가가 쓴 문장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나 의식을 ‘제로’에 두고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략) 독서라는 행위는 책에 씌어 있는 것과 자신이 느끼는 것이 ‘섞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중략) 독서는 저자가 쓴 것을 이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가 만나 작용하는 일종의 협업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편집 공학 용어로 말하자면, 독서는 ‘자기 편집’인 동시에 ‘상호 편집’입니다. 셀프 에디팅과 듀얼 에디팅이지요. (109쪽)

독서는 ‘읽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따라서 책을 읽고 있는 행위만을 독서로 간주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잘못입니다. 대체로 책은 우리가 읽기 이전부터 이미 ‘읽을 책’이 되어 있던 것입니다. (114쪽)

고딕 양식의 성당을 ‘입체화된 성서’라고 부릅니다. 밀교 사원은 ‘읽는 만다라’라고 하지요. (중략) 어떻게 보면, 우리의 머리나 마음도 이른바 ‘뚫려 있는 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안쪽으로 뚫린 책’입니다. (115쪽)

왜 표시하면서 읽는 게 좋을까요? (중략) 하나는 책 읽는 데에 철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집중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는 다시 읽을 때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는 점입니다. (117쪽)

이때의 노트나 파워포인트는 새하얀 상태가 아니라 이미 저자가 글을 써 놓은 노트나 화면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재편집하거나 리디자인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표시하면서 읽는 법’의 유쾌한 점입니다. 즉 책을 노트로 보는 겁니다. 책은, 이미 텍스트가 들어 있는 노트입니다. (119쪽)

책도 야구와 마찬가지입니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 모델’의 특징을 파악하면, 그 모델만으로도 그 저자의 책 한 권이 한눈에 들어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책의 다른 부분도 읽을 수 있게 되어 갑니다. 대강 이 정도를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면 다음에는 그 ‘글쓰기 모델’을 다른 저서에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델이 점점 쌓여 갑니다. 이것이 그 책을 읽는 사람의 독자적인 ‘읽기 모델’입니다. (123쪽)

한 번의 독서 체험을 그것이 끝났다고 해서 절대로 삭제(delete)하지 않는다는 것, 재시동(redet)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서 체험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다음의 독해력으로 연결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124쪽)

저자와 독자는 더 자주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의 ‘쓰는’ 행위와 독자의 ‘읽는’ 행위는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저자나 편집자는 ‘글쓰기 모델’을 어떻게든 ‘읽기 모델’로 만들어 나가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책입니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글쓰기 모델’은 ‘읽기 모델’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2쪽)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어떠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교환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략) ‘글쓰기 모델’과 ‘읽기 모델’입니다. 이 모델들에는 교환 혹은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는 이것을 ‘편집 모델(editing model)’의 상호작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중략) 편집 모델은 이처럼 정보를 편집할 때 교환하는 모듈입니다. 우리는 이 모듈을 사용해서 ‘의미’라는 것을 찾고, 그것을 보관하거나 유지합니다. 즉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의미의 교환’을 완성하는 것이 편집 모델입니다. (135~136쪽)

‘쓰다’와 ‘읽다’ 사이는 ‘편집하다’로 연결되어 있다. (137쪽)

편집 공학이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정보 편집의 모든 것을 다루는 연구 개발 분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미디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중략) ‘형식적인 정보 처리’가 아니라 ‘의미적인 정보 편집 과정’을 연구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세계관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전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138쪽) 

편집 공학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기억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표현 능력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편집 구조입니다. 따라서 다양하게 기억하고 표현하는 기본 능력은 기억력과 표현력 그 자체보다는 편집력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집력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편집 모델입니다. (140쪽)

커뮤니케이션이란 ‘메시지 기호’가 아니라 ‘의미’를 교환하기 위한 편집 행위입니다. (중략) 저자가 무엇인가를 쓰고, 편집자가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그 책이 서점에 진열되고, 독자가 구입해서 읽는 모든 과정에 공통적으로 ‘의미의 작용’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라는 것은, 이 과정을 저자와 편집자가 자유롭게 잘라 내어 만든 패키지 미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이 과정에는 ‘의미의 시장(市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42쪽)

독서란 (중략) 저자가 만들어 놓은 ‘글쓰기 모델’을 향해, 독자가 마침 가지고 있는 자신의 편집 모델을 올가미처럼 던져 넣고, 그곳에서 ‘읽기 모델’을 걸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나가는 행위입니다. (중략) 한 권의 책을 만나고 독서를 하는 행위는 거대한 역사가 지속해 오면서 전해 준 ‘의미의 시장’에서 이러한 체험을 재현하고 재생하고 또다시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이를 위한 패키지 미디어입니다. (144~145쪽)

정보나 지식은 기억 구조에 넣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의 편집 구조에 넣어 가듯이 자기 나름의 노트에 매핑해 가는 것입니다. (151쪽)

저의 독서술은 ‘링크를 늘리는 편집적 독서법’을 기본으로 합니다. 이를 위해 ‘링크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진진한 과정입니다. (156쪽)

저는 언제나 독서와 책장은 일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책에는 책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책장이 바로 비디오데크인 셈입니다. (158쪽)

책장이라는 하드웨어와 서적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대응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전혀 다른 높이와 폭의 선반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책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장은 당시 제 머릿속의 ‘지식의 배치도’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저뿐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었지요. (162쪽)

에도 시대 후기에 들어서 각지에 사숙(私塾)이 생겨났는데, 많은 학생들이 사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바로 그 사숙의 근간에 독서가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교육을 ‘향학(鄕學)’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의 관챠산에는 황엽석양촌사(黃葉夕陽村舍)와 염숙(廉塾)이 생겨 훈장으로 라이 산요를 모시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동야독서(冬夜讀書)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바로 ‘추운 겨울밤에 독서 습관을 붙인다’라는 커리큘럼입니다. (175쪽)

하나는 엄권(掩卷)이라고 해서 책장을 조금씩 읽어 나갈 때마다 잠깐씩 책읽기를 멈추고 책장을 덮은 다음 방금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면서 되밟아 나가는 방법입니다. (176쪽)

독서는 ‘모르기 때문에 읽는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중략) 독서는 ‘덮여 있던 것을 열어 나가는 행위’입니다. 이런 독서를 할 수 있다면 독서 오만에도 빠지지 않고 독서 싫증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덮여 있던 것’을 책으로 ‘열어 가는 주체’가 바로 독자입니다. 책이 열쇠 구멍이라면 그 구멍에 열쇠를 넣어 여는 것은 독자입니다. 그리고 편집자나 서점이 그 사이에서 중매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고, 그 열쇠와 열쇠 구멍의 관계의 프로세스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86~187쪽)

독서란 원래 위험 요소를 동반합니다. 그것이 독서입니다.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이 자신을 응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때로는 배신도 하고, 뒤통수를 때리기도 합니다. 부담을 지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독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독서가 재미있는 것입니다. (188쪽)

역시 누군가 추천해 주는 책은 꼭 읽어야 합니다. 그 의미를 10년 후에도 모른다 해도, 30년 후에는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194쪽)

책을 읽는 데에는 위험(risk), 존경(respect), 추천(recommendation)의 3R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196쪽)

원래 책과 지식은 인류가 처음 책을 만들었을 때부터 연결되어 있습니다. 책이나 텍스트는 따로따로 쓰여 있지만, 그것들은 다양한 연결과 잠시의 끊김, 관계성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205~206쪽)

독서는 현상에서 혼란스럽게 느끼고 있는 사고나 표현의 흐름을 정돈해 준다고 확신합니다. (222쪽)

각각의 사고나 표현의 본질은 ‘유추’이고 ‘연상’입니다. (중략) 저는 모든 사색, 논리, 표현, 행동을 ‘아르스 콤비나토리아(ars combinatoria)’라고 생각합니다. 결합의 기술, 즉 조합하는 기술입니다. 이 아르스 콤비나토리아로 발휘되는 것은 모두 유추입니다. 즉 유추하는 능력입니다. 유추야말로 저를 혁신하게 해 줍니다. (222쪽)

의미라는 것은 일본어를 아무렇게나 늘어놓는다고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알파벳을 무작위로 나열한다고 해서 의미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의 ‘싹’이나 ‘뿌리’가 있다면 거기에서 의미가 자라납니다. 과학에서는 이것을 ‘창발’이라고 합니다. (224쪽)

어떤 일이나 사회, 세계를 보는 시점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지(omniscient)의 시선으로 세계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조망하는 ‘새의 눈’이고, 또 하나는 편재(omnipresent)하는 눈으로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보는 ‘발의 눈’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처럼 전지한 ‘새의 눈’이 조감하는 묘사와 주인공 등이 한 지점에 한정적으로 머물며 관찰하는 ‘발의 눈’에 의한 묘사로 성립됩니다. 독서할 때도 이것을 번갈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238쪽)

편집 공학은 세상에 나돌고 있는 사전이나 연표를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을 독자 입장에서 세분화합니다. 그것은 ‘단어 목록’과 ‘이미지 사전’과 ‘규칙 모음’입니다. (239쪽)

‘지식’이라는 것은 공기 알갱이와 같이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채 아무데로나 떠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에는 반드시 ‘주소’가 있고, ‘장소’가 있고, 따라서 ‘오고 가는 법칙’이 있기 마련입니다. (251쪽)

근대의 묵독 사회는 ‘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럼, 그 잃어버린 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레코더나 라디오로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게 되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가 생겨났습니다. 작가는 ‘소리 나는 문자’를 쓰는 시나리오 작가로 변하였습니다. (252~253쪽)

정치는 ‘공정함’만 쫓아다니고 경제는 ‘효율성’만 쫓아다닐 때, 문화는 그 ‘가치’를 모순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다니엘 벨,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중에서) (261쪽)

인간이라는 것, 그것은 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이다. 그 문화가 유지되고 충실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적 가치를 생산하는 그룹과 그것을 배급하는 그룹이 합병해 버릴 위험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 만약 자본주의가 서적의 인쇄와 출판을 옹호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에도 위기가 찾아온다.(피에르 부르디외, 『자본주의의 습관』) (262쪽)

우리의 감정은 결코 튼튼하지 못합니다. 변하기 아주 쉬운 것입니다. 또 홀로 우뚝 설 것 같기도 하고 무너져 내릴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공감이 우뚝 섬과 무너짐의 경계 지점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즉 여기에는 ‘긍정의 영역’도 있고 ‘부정의 영역’도 있는 것입니다. 이 양족의 경계에서 일어날 법한 것을 찾으려고 저는 책을 읽어 왔습니다. 이런 책읽기를 ‘순수한 책읽기’ 혹은 ‘부서지기 쉬운 책읽기’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결여나 부족이나 구멍이 생길 수도 있는, 조금은 아슬아슬한 책읽기입니다. (266~267쪽)

책은 언제나 우화를 앞둔 매미이고, 비가 내리기 직전의 하늘입니다. (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