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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출판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어제 한국출판연구소가 주최한 제69회 출판 포럼에서 발표한 글이다. 발표 후 참석자 간 자유 토론이 있다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토론은 없었다. 김종수 소장님의 반론 아닌 반론(!)이 있었을 뿐. 나의 관심사는 콘텐츠 비즈니스로서 출판이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를 징후적으로 읽어 보려는 것이었다. 현재 출판계에서 시도 중인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출판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물론 출판의 기초 콘텐츠 전략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저자를 발굴하고 책을 잘 만들어서 독자와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 기본 콘텐츠 전략을 바탕으로 최근 출판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실천들을 징후적으로 읽어 보려는 마음에서 쓴 것이다.



앞으로 출판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오늘의 출판에서 살펴본 내일의 출판을 위한 시론(試論)



‘살림’과 ‘죽임’!

그러나 출판이 살고 죽는 것은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콘텐츠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출판을 이야기할 때, 피동의 프레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 프레임에서 나오는 출판 담론은 경험상 구체적이기보다는 선언적이고, 저자에서 독자에 이르는 가치 사슬에 있는 출판 주체 각각의 임무를 축소하고 책임을 흔히 ‘남의 탓’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오늘날 출판(특히 단행본 종이책 출판)은 (개별 출판사 차원이 아니라) 산업 전체적으로 볼 때 성장 모멘텀을 쉽게 마련하기 어려운 한계 비즈니스로 내몰린 상황이다. 먼저 이 사실에 엄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출판인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출판인이라면 단지 ‘좋은 책’을 만들고 산업을 성장시키는 일만이 아니라, 예를 들면 ‘책 읽는 교육’을 일으키고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노력을 다하며, 독서 관련 실천 운동을 파종하고 이를 곳곳으로 확산하는 데에도 투자와 참여를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노동법 준수 등 열악한 출판 노동 문제의 해결을 비롯하여 출판 산업 내부의 합리화 수준을 높이고 디지털 비즈니스 등 미래 콘텐츠 산업으로 변화하는 동력을 확보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출판계 전체가 이들과 관련된 실천에 출판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를 돌이켜 반성해 보는 일은 출판 산업의 미래를 능동으로 생각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도서 정가제 실시, 공공 도서관 예산 증액과 같은 출판 환경을 둘러싼 법적, 제도적 정비만으로는 하향세의 출판 산업이 다시 일어서는 반전의 계기를 간신히 얻을 뿐(그래서 소중하다), 산업 자체를 혁신해서 미래 산업으로 전환하는 실질적인 솔루션을 마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타인의 빛으로는 본래 자신을 온전히 밝힐 수 없는 법이다. ‘살림과 죽임’이라는 프레임에 스며들어 있는 외부(주로 정부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 등)를 향한 질문만큼이나 출판 내부의 실천들을 위한 질문과 대답을 깊게 따져보는 게 출판 산업의 미래를 예감하는 일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콘텐츠비즈니스로서 출판의 미래를 말하려면, 오늘날 한국 출판 산업 내부에 이미 출현해 있는 몇 가지 눈에 띄는 움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시도가 점차 증가 중인 이 실천들은 출판의 미래 비전을 찾는 이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출판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도약해 보려는 이 움직임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출판을 물리적인 제품(종이책)을 고급화해서 판매하는 ‘아트 상품 제조 비즈니스’로 이해하는 실천들. 

둘째, 물리적인 제품을 중심으로 방송, 강연, 콘서트, 문구, 저작권 등 파생 서비스를 함께 판매하는 ‘복합 비즈니스’로 이해하는 실천들. 

셋째, 물리적인 책을 벗어나서 온갖 플랫폼을 통해 ‘읽기’를 제공하는 ‘서비스 비즈니스’로 이해하는 실천들.


이 자리에서 짧게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이러한 실천 흐름들은 저자, 인쇄, 서점, 독자 등 출판의 오랜 친구들과 앞으로 어떤 가치사슬을 이룰 것인지, 즉 ‘출판 산업의 장․단기적 성격 변화’를 따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출판 역시 디지털 경제에 편입됨에 따라 물리적인 서점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프랑스 등 온라인 서점의 과잉 할인 판매를 법적으로 규제한 국가에서도 하향세를 늦출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오프라인 서점의 일반적인 감소 추세는 출판의 구조 변동을 거세게 강요한다. 출판을 다시 정의하려는 위의 세 가지 흐름은 거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지금이 아니면 나중이라도, 늦추든 빨리 가든 간에 이러한 실천들은 모든 출판 주체를 덮칠 것이고, 다소의 변형이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라면 대개는 이중 한 흐름을 택해서 실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물론 누군가는 전혀 다른 실천 흐름을 만들 수도 있다.)

콘텐츠 비즈니스로서 출판의 첫 번째 흐름은 ‘물성의 극단적 강화’로 나타난다. 윌리엄 모리스의 말처럼, 미래의 책(종이책)은 지금보다는 소수를 위해 공예품에 가깝게 만들어질 것이다. 책 콘텐츠의 내용을 소비하는 것과 콘테이너(물리적 책)를 소비하는 것이 분리된다. 콘텐츠 소비는 대부분 온라인 구독을 통한 ‘읽기’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콘테이너 소비는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장식품을 구매하는 형태와 유사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면 편집 실천과 디자인 실천이 하나로 통합되고 제지, 인쇄, 제본 등의 영역에서 장인적 깊이와 높이를 달성하는 쪽으로 출판 산업은 변할 것이다. 이미 홍대 주변의 독립 출판사와 독립 서점을 중심으로 움직임이 흔하게 나타나는 중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일정한 실험을 거친 후에는 모든 출판사가 기본 실천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이에 대한 반발로 낮은 가격을 경쟁력으로 하는 ‘문고본’의 산업적 등장도 비즈니스로는 깊게 생각할 수 있으며, POD를 이용한 극단적 다품종 소량 생산을 실천 전략으로 삼는 출판도 가능할 것이다.(이러한 움직임들 역시 이미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두 번째 흐름은 출판사가 전자적, 물리적으로 서적을 제조 및 판매하는 서적 사업 영역을 넘어서서 자사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연결 사업까지 포괄적으로 직영하는 ‘멀티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전환해 가는 전략이다. 필자가 「출판사의 입장에서 본 출판 산업의 동향과 전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출판사에서 서점, 카페, 빵집, 문구점, 아카데미 등을 직영으로 운영하면서 자사 출간 서적은 물론이고 (서비스) 파생 상품을 함께 판매하는 경향”이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미 문학동네, 위즈덤하우스, 창비, 자음과모음, 후마니타스 등을 비롯한 많은 출판사들이 관련 점포를 개점했거나 개점 예정으로  있으며, 민음사에서 운영 중인 ‘북클럽’ 역시 오프라인 공간을 개설하지 않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출판의 산업적 확장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로 원소스멀티유즈(OSMU)라는 말을 써 왔다. 영화나 드라마나 게임 등 유관 산업에 대한 저작권 판매 또는 제휴를 통한 산업적 확장 방식이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이러한 산업 흐름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플랫폼 출판(Platform Publishing for Multi-Contents Business)이나 북센트릭 비즈니스(Book-Centric Business)로 부르는 게 적당한 이러한 흐름은 출판이 저자의 콘텐츠를 가운데에 두고 다양한 콘텐츠 상품들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온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진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세 번째 선택은 출판사가 물리적인 책의 생산을 기능적인 옵션으로 생각하면서 사업 영역을 읽기 서비스 중심의 수직 통합적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동진의 빨간 책방(위즈덤하우스), 라디오책다방(창비)과 같은 출판사 자체 미디어의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열린책들 페이스북 페이지는 물론이고 민음사와 웅진의 북클럽도 어쩌면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수천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독자들을 이미 확보한 이들 미디어는 콘텐츠 중심의 충성도 높은 독자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커뮤니티를 필연적으로 생성하는데, 이는 단순한 홍보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독자 커뮤니티의 크기가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른 후에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잠재적으로 보여주듯 저자와 독자를 직접 연결하고 전자 콘텐츠 구독이나 판매 같은 비즈니스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읽기 서비스 플랫폼’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신영미디어에서 운영하는 로맨스 소설 커뮤니티(및 직영 전자책 서점)인 에스와이북(SYBOOK)은 이미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을 나름대로 실현 중이다(네이버 웹툰, 다음 스토리볼, 레진코믹스 같은 곳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출판이 핵심 사업을 제품 제조에서 읽기 서비스로 옮기게 되면, 전자책이나 북앱을 개발해서 판매하거나 독자들과 일회적으로 소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콘텐츠의 맞춤 판매, 부분 판매, 연재 판매, 구독 판매, 강의 판매 등 웹과 모바일 영역에서 다양한 사업적 실천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온라인 공간에서 책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을 어떤 식으로든 늘려감으로써 오프라인에서 점차 축소되는 시장을 전체적으로 다시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출판계 전체가 도전적으로 실천할 만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콘텐츠를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내용’뿐만 아니라 ‘기술’ 및 ‘경제’도 같이 고려하는 게 옳기 때문에 산업 성격이 변화하면 필연적으로 ‘출판 기술’과 ‘출판 경제’도 변화하게 마련이다. 출판이 콘텐츠 비즈니스로 전환할 때 일어나는 기술적, 경제적 변화를 촉진하고 개별 출판사가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떨어뜨리려면, 정부 차원에서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산업 표준의 조속한 확립, 민간 차원에서는 대한출판문화협회를 비롯한 출판단체들의 공동 투자와 강한 협업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콘텐츠 비즈니스로서 출판을 담당할 여러 주체(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의 양성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