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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쿤데라, 참을 수 없는 관능의 가벼움




끝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투덜거림,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들. 네이버 지식iN 등에 넘쳐 나는 기이한, 정말 기이한 회귀들. 가령, 연어 떼처럼 쿤데라의 새로운 작품 앞으로 돌아왔다가 흩어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말들, 말들, 말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봐도 무슨 얘긴지, 주제라든가 말하려는 바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쿤데라 소설에서 말하는 게 무엇입니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슬픈 내용인가요? 저는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돼서 모르겠는데, 지인 중에 펑펑 울었다는 분도 있어서. 솔직히 저는 봐도 슬픈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쿤데라의 작품에는 분명히 읽기를 촉발하는 동시에 골치를 퍼뜨리는 힘이 있다. 매혹과 당혹의 이중 나선. 한여름 밤바다같이, 한없이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다가가서 가만히 발을 담그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철학적 관념의 엄숙함과 육체적 관능의 유혹이 엄밀한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공존한다. 언뜻 보기에 난해하다. 그렇지만 자세히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균형을 파괴하는 것은 오히려 관념 쪽으로 심하게 쏠려 버린, 독자들의 이상하게 기울어진 읽기다. 표현이 아니라 생각에, 사건이 아니라 주제에 집중하는 편집증. 쿤데라 소설에서 퍼져 나간 밑줄들,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수없이 교환되고 공유되는 밑줄들은 거의 모조리 철학적인 (체하는) 진술들이다. 가령,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유명한 첫 장에 나오는 구절 같은.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유의 심오함을 자랑하는 듯한 문장들, 비밀 지도처럼 독자들을 매혹해 해독의 탐정으로 만들고 마침내 좌절시키는 문장들. 쿤데라의 작품들에 아주 흔하게 나오지만, 이런 문장들에는 사실 별다른 깊은 뜻이 없다. 소설의 중심 사건과 큰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들을 건너뛰어도 소설을 즐기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는 만큼 굳이 이해하려 애쓸 이유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진술이 문학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주 커다란 미학적 효과가 있다. 의미가 아니라 무의미 쪽에서 말이다. 이 문장들은 삶의 의미를 잃고 여자의 몸을 탐닉하는 바람둥이 토마시를 돋보이려는 장치로 쓰인다. 깊은 의미를 함축한 듯해 보이는 문학적 헛소리인 것이다. 정작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고 편력에 나선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이다. 헛소리를 꿰맞추려고 애쓰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읽는 게 훨씬 문학적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농담』에서 쿤데라는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우리는 무시했잖아.” 그렇다. 우리는 쿤데라 소설에서 육체를 무시하곤 한다. 괄호 쳐서 애써 망각하고 삭제해서 휴지통에 넣어 버린다. 쿤데라가 내뱉는 말들의 형이상학에 압도되어 그가 사상가가 아니라 소설가라는 사실을, 등장인물들이 육체를 입고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는다. 『불멸』의 첫 장면을 보라. 육체가 만들어 내는 단순한 동작에 대한 매혹을. 이 매혹이 사유를 끌어들이고 사건을 잉태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간다.

“그녀는 수영복 차림으로 풀 가장자리를 따라 수영 강사를 지나쳐 사오 미터쯤 갔을 때 문득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나의 심장이 졸아들었다. 그 미소, 그 손짓, 바로 스무 살 아가씨 같지 않은가! 그녀의 손은 눈부시도록 가볍게 날아올랐다. 마치 그녀는 장난하듯, 울긋불긋한 풍선 하나를 연인에게 날려 보낸 것 같았다.”

소설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매혹되는 장면을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법이다. 인생의 드라마 대부분은 철학적인 관념의 심오함이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사소하고 가슴 뛰는 매혹이 만들어 낸다. 쿤데라의 소설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아마도 무의미 속에서 의미가 탄생하는 한 순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송두리째 뒤바꾸고, 한 사회의 물줄기를 이제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되돌리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난해함은 없다. 쿤데라 소설을 읽고 느끼는 난해함은 이 점에서 눈을 돌리려는 데에서 생겨난다. 육체에는 사유가 없고, 관념에만 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착각. 육체는 무의미하고 관념만이 의미가 있다는 환상. 이러한 착시가 독자 스스로를 작품의 진정한 즐거움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것이다. 가령,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을 읽어 보자.

“그녀는 토마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은 눈이 아니라 거기에서 십여 센티미터 위,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를 풍기는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견딜 수 없어진다면 그가 내뱉는 소리를 알아먹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나서이리라. 쿤데라 작품의 매력은 대부분 이러한 육체적 진실에 대한 노골적인 진술에서 나온다. 나는 영원한 회귀가 어쩌니 하는 것을 쓰는 쿤데라보다 이 문장을 쓰는 쿤데라, 남녀 사이의 사랑을 농밀하고 정직하게 탐구하는 쿤데라가 더 좋다. 그리고 이 탐구를 애호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쿤데라의 세계 속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쇠가 거기 있는 것이다.

지난여름, 『향수』 이후 십여 년 만에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가 번역되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곧바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또다시 난해하다느니, 알아먹지 못하겠다느니 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영원한 회귀. 언젠가 한번 경험한 듯한, 지겹고 지루한 반복이다.

사건을 인과관계에 따라 나열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동시 배치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줄거리를 요약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쿤데라 특유의 매력적인 제목은 읽기의 혼란을 가중한다.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철학 소설. 물론 그렇게 읽을 수도 있고, 거기에서도 풍요로운 의미들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분명 에로틱하고 유혹적인 ‘여자들의 배꼽’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 알랭이 파리 거리를 걷다가 아가씨들의 드러낸 배꼽에 매혹되는 데에서 시작해서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 매혹의 이유를 찾아가는, ‘배꼽의 관능’에 대한 서사적 탐구이다. 이쪽이 더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의미가 어쩌니 무의미가 어쩌니 하는 사변에 사로잡히지 말고, 소설 내내 관능의 존재들과 유혹의 존재들이 서로를 훔치기 위해 주고받는 온갖 신호들을 따라가는 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난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다. ‘무의미의 축제’는 곧 바람둥이들의 축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쿤데라 소설에서 반복되는 것은 난해한 사유가 아니라 관능의 표현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 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6월의 어느 날, 아침 해가 구름에서 나오고 있었고, 알랭은 파리의 거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아가씨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거기에 완전히 홀려 버렸다. 홀려 버린 데다 혼란스럽기까지 해서,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싶었다.”

이 놀라운 포착력이 바로 쿤데라다운 점이다.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위대한 작가는 결코 자신의 서사 전략을 바꾸는 법이 없다. 흔히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상의 어느 한 부분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사건을 이어가고 사유를 불러들여 읽는 이들로 하여금 결국에는 일상의 높이와 깊이를 경험하게 하는 이야기 전략. 관능과 매혹의 한없는 반복이 이어가는 사건들을 쫓아간다면, 쿤데라 소설의 난해함이란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음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남성잡지 《루엘》 10월호에 발표한 글이다. 쿤데라, 그렇지만’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다. 작가 이름과 접속사로 이루어진 제목 특집이어서 어쩔 수 없이 제목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블로그에서는 본래대로 실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