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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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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새벽 숲길을 거닐며 평명(平明).어둠 속, 흙으로 맨발을 푸는 순간, 이 말이 떠올랐다. 새벽을 나타내는 말이다. 평(平)은 평평하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평등하다. 명(明)은 밝고, 맑고, 환하고, 깨끗하다. 어떻게 조합해도 아름답다. 온 세상이 골고루 빛으로 차오르는 때, 소나무 청량한 향기가 사방으로 가득하다. 콩잎이 바람에 스륵스륵 소리를 낸다. 이슬을 흠뻑 덮어쓰고도 귀뚜라미는 씩씩하고 우렁차게 노래한다.“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 뭐가?! 뭐가?!”(황인숙, 「가을밤 2」) 아아, 정말 쓸쓸하구나. 처음 물음표 둘은 즐거운 반문이지만, 뒤쪽 물음느낌표 셋은 어쩌면 쓰디쓴 울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름은 아직 물러서지 않았고 가을은 미처 이르지 않았으니, 바람이 불어도 쓸쓸하지 않고 소름이 돋아도 여..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장영태 옮김, 을유문화사, 2008)을 읽다 횔덜린을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렸을 적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가난하던 아버지가 해 주었던 유일한 책 선물이 횔덜린을 다룬 하이데거 책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책을 조르던 나를 견디다 못해 당신은 회사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 오셨는데,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책이 바로 횔덜린을 다루고 있는 하이데거의 『숲길』을 부분 발췌한 책이었다. 어린 나이(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로는 몇 줄 읽어 나갈 수조차 없이 난해했지만, 거기에서 다루었던 횔덜린 시 몇 편을 그나마 흥미롭게 읽었던 것만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고등학교 올라가서 문예반에서 시를 쓸 때, 노트에 적었던 것을 끄집어 내서 이리저리 변주해 보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횔덜린은 내 원초적..
망오십(望五十), 매우(梅雨)에는 닥치고 독서 1두 주째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는 시내에 전시회를 보러 외출하려다가 왠지 ‘읽는 일’을 하고 싶어져서 하루 종일 소파와 침대와 책상을 오가면서 책을 읽었다.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파워 클래식』(어수웅)에 실린 짤막한 서평 몇 꼭지를 챙겨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본사 및 세계사 이해에 새로운 시각을 던진 화제작 『중국화하는 일본』(요나하 준)을 읽고, 그다음에는 『도련님』(나쓰메 소세키), 『그리운 친구여 - 카프카의 편지 100선』(카프카), 『검찰관』(고골), 『휘페리온』(횔덜린) 등의 고전, 『육체쇼와 전집』(황병승),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등의 시집,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엄마도 아시다시피』(천운영) 등의 소설, 그리고 2010년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열 권짜리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