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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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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긍정의 인간, 돈키호테(한겨레 기고) 《한겨레》 출판면에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라는 코너가 있다. 이곳에 글을 맡아서 세 번 쓰게 되었다. 첫 번째로 고른 책은 최근에 다시 완독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였다. 아래에 옮겨 둔다. 지난해 5월, 편집자로 일한 지 스무 해째 된 것을 기념해 아내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했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이 세속의 번뇌를 증발시키고, 늦도록 들지 않는 밤과 온화한 바람이 산책을 한없이 부추기는 가운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서 ‘편집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까지 온갖 의문을 떠오르는 대로 풀어 놓고 마음껏 생각을 즐겼다.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말로 정리했는데, 내 인생은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러다 한..
메튜 베틀스,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강미경 옮김, 넥서스북스, 2004)를 읽다 추석 명절 첫날, 노원정보도서관에서 빌려온 메튜 베틀스의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강미경 옮김, 넥서스북스, 2004)을 완독했다. 출간되었을 때 상당히 흥미로워 보여서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절판되는 바람에 구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10월에 대전 유성구 도서관 모임에서 특강이 있는데, 이 기회를 틈타 평소 많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도서관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책들을 찾아서 읽는 중이다. 이 책도 그중 하나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사노 신이치의 『누가 책을 죽이는가』(한기호 옮김, 시아출판사, 2002), 로널드 맥케이브의 『도서관, 세상을 바꾸는 힘』(오지은 옮김, 이채, 2006), 이노우에 스스무의 『중국 출판 문화사』(장원철·이동철·이정..
읽기에 헌신하는 삶을 위한 세 가지 방법 그러니까 스페인 여행 이후, 나는 조금 더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말라가의 푸르른 지중해 바다 앞에서, 문득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는데, 여행 내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읽기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근거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읽는 것이 나의 도약대이자 진지이고 무덤이어야 하는 것이다. 편집자의 삶이란, 읽고 쓰는 일에는 오히려 지쳐 있기 마련이어서 자칫하면 진행하는 책 외에 자발적 독서가 증발하는, 읽기의 사막에 사는 데 익숙해지기 쉽다. 책을 둘러싼 수많은 전략과 전술의 난무가 읽기의 순박한 즐거움을 앗아 버리는 역설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정화인 책을 다루는 편집자가 정신적 공허에 시달리는 기묘한 삶의 아이러니.스페인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앞으로..
고골, 『검찰관』(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5)을 읽다 명불허전. 몇 번을 읽어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고골의 대표작인『검찰관』(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5)이다. 이 격렬한 유머, 치열한 풍자,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속물들의 연쇄, 작품의 인간들은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최악의 비천함 속에 빠져 있다. 한 치의 꺼리낌도 없이 고골은 우리를 인간의 속물성이 고스란히, 조금의 그늘도 없이 폭로되는 그 잔혹함 속으로 몰고 간다. 읽는 내내 정말로 즐거웠다. 조주관 선생의 해설은 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와 쟁점 들을 고스란히 정리해서 보여 준다. 고골의 영원한 현재성은 근본적으로는 작가 본인에게서 나오겠지만, 어쩌면 이런 방대하면서도 정열이 넘치는 러시아 비평가들의 미학적 투쟁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오늘날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망오십(望五十), 매우(梅雨)에는 닥치고 독서 1두 주째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는 시내에 전시회를 보러 외출하려다가 왠지 ‘읽는 일’을 하고 싶어져서 하루 종일 소파와 침대와 책상을 오가면서 책을 읽었다.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파워 클래식』(어수웅)에 실린 짤막한 서평 몇 꼭지를 챙겨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일본사 및 세계사 이해에 새로운 시각을 던진 화제작 『중국화하는 일본』(요나하 준)을 읽고, 그다음에는 『도련님』(나쓰메 소세키), 『그리운 친구여 - 카프카의 편지 100선』(카프카), 『검찰관』(고골), 『휘페리온』(횔덜린) 등의 고전, 『육체쇼와 전집』(황병승),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등의 시집,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엄마도 아시다시피』(천운영) 등의 소설, 그리고 2010년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열 권짜리 김..
라 셀레스티나(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의 『라 셀레스티나』(안영옥 옮김, 을유문화사, 2010)는 1499년에 나온 스페인 최초의 소설이다. 구성은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희곡처럼 되어 있으나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읽어 주는 소설로 알려져 있다. 칼리스토와 멜라베아의 비극적 사랑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욕망을 숨김 없이 그려낸 이 작품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와서 중세 가톨릭 전통과 신흥 르네상스 정신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이후에 전개될 스페인 정신의 한 원형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남김 없이 드러내는 강렬한 표현들과 생동감 넘치는 대화는 이 작품이 왜 걸작인지를 저절로 알게 해 준다. 게다가 페이지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