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수영

(4)
편집자로 사는 것, 역시 좋은 일이네요 편집자로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오래전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저자로부터 첫 원고를 받아서 읽는 일이야말로 저한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편으로 도착한 봉투를 뜯어서 원고 뭉치를 꺼내거나 전자 우편에 딸린 첨부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은 감격과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죠. 회사를 나온 후, 출판에 관련한 여러 일을 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가겠지만, 그 어떤 일도 첫 원고를 들여다보는 기쁨을 대체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아직 텍스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기에 첫 원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반적 얼개는 당연히 잡혀 있지만, 전체가 튼튼하도록 단단한 구조를 세우고, 구체적인 세부를 만지고, 새로 넣을 것과 굳이 뺄 것을 고민하는 일을 편집자가 어떻게 해 내느냐에 따라 ‘책’의 모..
소설의 진짜 재미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동아일보 인터뷰) 역시 한 달 전쯤 《동아일보》 김지영 기자랑 인터뷰를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수다도 떨었습니다. 노벨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어쨌든 북21에서 한국소설의 표지를 분석해서 낸 보고서 내용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내용 자체의 깊이도 깊이이지만, 이런 시도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독자들은 소설에서 재미와 의미를 함께 얻고자 하는데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들은 재미는 빼고 의미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소설 카피뿐 아니라 한국 소설의 엄숙한 내용을 아우르는 지적임은 물론이다. 오해가 조금 있을까 봐 덧붙여 둡니다. 소설 자체가 ‘의미를 향한 강박’을 갖..
편집자의 책상(프레시안 기고문) 오늘날 한국 출판 문화에서 프레시안북스는 독특한 진지를 점하고 있다.사실 보도와 중립적(?) 리뷰 중심의 언론들 사이에서 프레시안북스는 거의 유일하게 진지한 읽기를 기반으로 한 비판적 서평이 실리는 곳이다. 거기다 주말마다 포털 사이트의 첫 화면에서 눈을 더럽히는 온갖 낚시 기사들 사이에서 지적 자극으로써 사람들 눈길을 끌려고 안쓰럽게 몸부림쳐 주는 저자들과 편집자들과 독자들의 친구이기도 하다.어쨌든 그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온라인 기사들 중 일부를 한 달에 한 번씩 따로 모아서 독립출판사 알렙에서 펴내는 종이 서평지 《Pressian Book Review》가 있다. 지금 두 호밖에 나오지 않았고 기사도 온라인 기사들을 옮겨 온 것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이 잡지가 서점 공간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26일( 토) 1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민음사 펴냄), 15쪽) 활자 유랑자 금정연 씨가 프레시안에 쓴 글 「김수영의 독설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양아치!"」에서 마주친 구절. 나보코프는 감각의 천재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영원한 거주자를 이토록 감각적 표현으로 보여 준 이는 많지 않다. 눈을 감고 가만히 굴려 본다. 내 마음속 그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혀끝에 올려서 한 자씩 튀겨 가면서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생각해 본다. 내 혀끝은 어떤 모양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가? 문장은 체험과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단련된다. 멋진 구절이다. 롤리타 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