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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소설 / 희곡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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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재(非在)들을 위한 점멸 화법 ― 조해진, 『아무도 보지 못한 숲』(민음사, 2013)을 읽고 여수는 물은 아름답고 사람은 넉넉했으며 음식은 맛있었다. 장어를 샤브샤브로 살짝 데쳐서 먹는 하모 유비키는 혀에 닿자 녹아 내렸고, 갓김치는 이에서 사각대더니 알싸한 맛을 정수리까지 전달했으며, 군평선이(금풍생이)와 서대 구이는 쫀득하게 씹히면서도 고소해서 자꾸 젓가락이 갔다. 갯벌에서 잡힌 각종 해물들을 한 상에 크게 차려 내는 갯것정식은 다채롭고 화려하고 신선했으며, 사이사이 각종 무침들과 맛 깊은 묵은지들은 밥을 불러들였다. 지난 겨울에 갔던 목포가 전라우도 음식의 극이라면, 올 여름 여수는 전라좌도 음식의 절정이었다. 지난 주말부터 어제 저녁까지 사흘에 걸쳐 여수에 다녀오느라 전혀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회사 갔다가 돌아와 잠들기 전에 잠시 짬을 내서 지난주에 읽었던 조해진 장편소설 『아무도 보..
프리드리히 횔덜린, 『휘페리온』(장영태 옮김, 을유문화사, 2008)을 읽다 횔덜린을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렸을 적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가난하던 아버지가 해 주었던 유일한 책 선물이 횔덜린을 다룬 하이데거 책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책을 조르던 나를 견디다 못해 당신은 회사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 오셨는데,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책이 바로 횔덜린을 다루고 있는 하이데거의 『숲길』을 부분 발췌한 책이었다. 어린 나이(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로는 몇 줄 읽어 나갈 수조차 없이 난해했지만, 거기에서 다루었던 횔덜린 시 몇 편을 그나마 흥미롭게 읽었던 것만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고등학교 올라가서 문예반에서 시를 쓸 때, 노트에 적었던 것을 끄집어 내서 이리저리 변주해 보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횔덜린은 내 원초적..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 · 당통의 죽음』(홍성광 옮김, 민음사, 2013)을 보고 읽고 듣다 어떤 책은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내 삶으로 들어온다. 요즘 읽은 책 중 하나인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 · 당통의 죽음』(홍성광 옮김, 민음사, 2013)이 그렇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잘 몰랐다. 뷔히너라면 작품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고,(물론 대학 다닐 때 『당통의 죽음』을 읽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독일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에 붙은 이름으로 주로 들어 보았을 뿐이었다. 물론 이 문학상이 범상치 않은 것인 만큼 그 작품의 무게와 깊이도 남다를 것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희곡이라서 그런지 좀처럼 읽어 볼 마음이 일지 않았다.그런데 기적처럼 뷔히너의 희곡을 읽게 된 계기가 연속으로 내 삶에서 일어났다. 그 첫 번째는 풍월당 대표이자 음악 평론가인 박종호 선생과의 만남..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양윤옥 옮김, 좋은생각, 2007)을 읽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은 꽤 오래전에, 그러니까 아마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무렵에 읽고 지금까지 큰 관심을 두고 찾아 읽지는 않았다. 신구문화사나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등에 섞여 있던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우미인초」 같은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 때. 이광수의 소설을 공부하면서 소세키가 자주 언급되곤 했는데, 그때는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일본 작품에 대한 폄훼가 살짝 학교 분위기여서 다시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중에 회사에 들어와서 시마다 마사히코의 『피안 선생의 사랑』(현송희 옮김, 민음사, 1995)을 만들 때, 그 후에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2005)을 편집할 때, 꼭 한 번 다시 읽어 ..
어떤 짐승들의 언어 심리학적 독백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책들이 글을 불러들이는 순간에 마침 시간도 있다는 것은 내겐 중요한 행운이다. 이 삶이 오래 계속될 수 있기를. 저녁을 먹은 뒤,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덥기에 문득, 이열치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천운영의 이번 소설집에 대한 여러 메모들이 비죽 노트에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이게 눈에 띄지 않았다면, 아마 낮에 딸애와 같이 본 '고갱 전시회'나 '슈타이들 전'에 대해 썼을 것이다. 어쨌든 그 메모들을 두서없이 이어붙여 일단 여기에 올려 둔다. 어떤 짐승들의 언어 심리학적 독백―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 1지난주 천운영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 2013)을 모두 읽었다. 작가한테 선물받은 책을 막 읽으려는 즈음에 집사람이 먼..
고골, 『검찰관』(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5)을 읽다 명불허전. 몇 번을 읽어도 전혀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고골의 대표작인『검찰관』(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5)이다. 이 격렬한 유머, 치열한 풍자,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속물들의 연쇄, 작품의 인간들은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최악의 비천함 속에 빠져 있다. 한 치의 꺼리낌도 없이 고골은 우리를 인간의 속물성이 고스란히, 조금의 그늘도 없이 폭로되는 그 잔혹함 속으로 몰고 간다. 읽는 내내 정말로 즐거웠다. 조주관 선생의 해설은 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와 쟁점 들을 고스란히 정리해서 보여 준다. 고골의 영원한 현재성은 근본적으로는 작가 본인에게서 나오겠지만, 어쩌면 이런 방대하면서도 정열이 넘치는 러시아 비평가들의 미학적 투쟁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오늘날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라 셀레스티나(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의 『라 셀레스티나』(안영옥 옮김, 을유문화사, 2010)는 1499년에 나온 스페인 최초의 소설이다. 구성은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희곡처럼 되어 있으나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읽어 주는 소설로 알려져 있다. 칼리스토와 멜라베아의 비극적 사랑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욕망을 숨김 없이 그려낸 이 작품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와서 중세 가톨릭 전통과 신흥 르네상스 정신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이후에 전개될 스페인 정신의 한 원형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남김 없이 드러내는 강렬한 표현들과 생동감 넘치는 대화는 이 작품이 왜 걸작인지를 저절로 알게 해 준다. 게다가 페이지마다 ..
치누아 아체베, 세상을 떠나다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가 세상을 떠났다. 82세였다. 젊을 때부터 읽고 마음에 간직해 왔던 문학과 사상의 대가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나이들어 감의 한 증거일까. 비워지는 것은 늘어만 가는데, 채워지는 것은 간혹이다. 쓸쓸한 감정에 주말이 즐겁지 않다. 치누아 아체베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세기 말 아프리카의 한 부족 마을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탈식민주의 소설의 명작이다. "자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평생 동안이나 추방당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얌도 자식까지도 모든 것을 잃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난 한때 아내가 여섯이었지. 지금은 왼쪽과 오른쪽도 구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