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의 섬뜩한 경고다. 심층 탐사 보도를 통해 필리핀 두테르테 독재 체제의 무법과 탈법을 폭로해 왔던 레사는 페이스북이 진실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페이스북은 허위 정보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조작된 정보를 퍼뜨리는 데 몰두하는 등 편향성을 띤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하우건 전 페이스북 수석 프로덕트 매니저 역시 미국 의회 증언에서 “(페이스북은) 아이들에게 직접 해를 끼치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플랫폼”이라고 폭로했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애초부터 정보의 편향성이나 왜곡된 사실을 가리지 않고 개인 성향에 맞춤한 정보만 반복해서 보여주고,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주변에 모아 줌으로써 특정 신념과 편견을 학습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캐스 선스타인의『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에 따르면,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자주 소통하면 인간 사고는 극단에 빠지고, ‘내 생각’과 ‘내 편’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는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된다. (중략)
미국의 문화비평가 지아 톨렌티노는『트릭미러』에서 SNS가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로 정의된 세계”라고 주장한다. 자아를 과시하고 부풀려 ‘좋아요’나 ‘하트’를 구걸하지 않으면 아무 주목도 못 얻는 세계란 뜻이다.
SNS는 하루에 몇 번 이상 타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자기가 사라지는 듯한 디지털 우울증을 일으킨다. SNS를 즐길수록 우리 자아는 사실보다 의견에 집중하고, 분노와 혐오의 놀이를 즐기도록 변해 간다. 정상보다 비정상이, 상식보다 파격이, 중도보다 극단이 주목의 선도가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SNS는 요술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SNS는 실제 자아와 디지털 자아를 분리해서 ‘꾸며진 나’가 ‘현실의 나’를 대체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SNS는 인간을 꾸미기 좋아하는 허언증 환자로 변형한다. 표상된 이미지와 실제의 자아가 다른 디지털 성형이 갈수록 유행한다. 이러한 불일치가 지속되면 결국 화면 속 자아가 현실의 자아를 덮여쓰는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게다가 ‘보정된 자아’가 실제의 자아보다 멋지므로, 무겁고 귀찮은 대면 관계보다 가볍고 간단한 소셜 관계에 더 신경 쓴다.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연인이 마주 앉아 연애하는데, 서로한테 집중하지 못한 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풍경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다. 함께 있어도 혼자 있는 고독에 시달리는 마음은 SNS 대화가 실제 대화보다 진실하게 다가서는 소외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외로워지는 사람들』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생각이나 정보 교환이 작은 스크린에 맞도록 재구성”되는 세계는 자아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SNS는 온갖 수단으로 우리 반응을 닦달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가치와 정체성을 생각하고 감정을 관리”하면서 “자신을 발견할 시간”을 빼앗는다.
SNS의 재촉에 대응하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기보다 남의 사유를 퍼 나르고, 전후를 살펴서 신중히 말하는 대신 ‘좋아요’와 ‘화나요’ 버튼으로 쫓기듯 감정을 표현하는 데 몰두한다. 숙고하지 않은 감정적 언어의 범람은 진정한 자아를 훼손하고 진실의 언어를 파산시킨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우리 편 이야기는 자주 들려주고 다른 목소리들은 배제한다. 정치의 언어가 여기에 중독되면 생각은 균형을 잃고 적대는 커진다. 최근 우리 사회도 소셜미디어 의존증이 심각하다. 적절한 절제가 없다면 레사의 경고처럼 민주주의를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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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몇 해 전 쓴 칼럼인데, 요즘 벌어지는 상황을 생각하다 새삼 다시 읽게 됐다.
책은 느린 미디어가 아니다. 미래의 지평선을 앞서 끌어다 쓰기에 느리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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