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에 가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연주를 들었다. 지휘는 얍 판 츠베덴, 모두 5악장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곡이었다. 음반이나 유튜브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게 더 익숙한 시절이지만, 100여 명의 연주자와 합창단이 힘을 합쳐서 선율을 타는 현장의 위엄과 역동을 따라잡지 못한다. 교향곡은 떨어져 홀로 감상할 때보다 연주자와 함께 그 안에 뛰어들어 헤엄치면서 몰입할 때 비로소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참여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연주였다.
말러의 교향곡 ‘부활’은 죽음의 경험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말러는 꿈속에서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잠들듯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체험이 1악장 장례 행진의 모티브를 이룬다.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서 무(無)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면, 애초에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고통을 겪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인간의 삶이란 결국 신의 한마디 농담이나 한순간 장난에 불과한가? 붓다가 노쇠와 죽음을 겪은 후 무상(無常)을 깨달았듯, 말러 역시 이 순간 인간 삶의 실체를 알아챘다. “인간은 커다란 곤궁 속에 있다. 인간은 거대한 고통 속에 있다.” 문제는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말러 : 음악적 인상학』(책세상, 2004)에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말러 음악의 핵심에 파현(Durchbruch, 破顯)이 있다고 주장한다. 파현이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 구멍을 뚫고 돌파구를 내서 희망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 와중에 낡은 것은 찢겨서 사라지고, 막힌 것은 뚫려서 열리며, 답답한 것은 뒤집혀서 시원해진다. 파현은 곤궁과 고통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행위다.
우리에게 파현이 필요한 건 답답한 현실의 움직임(세계 운행) 탓이다. 지극히 세속적인 이 움직임은 늘 떠들썩하고 시끄러우며 항상 긴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요란은 대단하고 화려해 보여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본질적인 건 그 안에 하나도 담기지 않은 까닭이다. 아도르노는 말한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 세상의 규범을 만족시키지 않는 것인데도, 그걸 보고 세상은 자기가 이겼다고 환호성을 질러댄다.”
예술은 이 답답하고 떠들썩하기만 한 세상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다. 그것은 우리 눈을 가리는 현실의 장막을 찢어서 구멍을 내고, 세계의 진짜 모습, 낯선 실체를 보도록 만든다. 말러는 이 세계가 질서 있고 조화롭기보다는 슬픔이고, 공허이며, 억압이라고 말한다. ‘부활’에서 말러는 서정적 선율 속에서 수시로 끼어드는 불협화음을 통해 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일종의 영적 순례기 형태를 띤다.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한 인간의 분투는 결국 공허와 불안을 넘어서는 힘을 찾아낸다. 사랑이다.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듯한, 합창곡으로 그는 우리에게 선언한다. “내가 스스로 얻은 날개로, 열렬한 사랑으로, 나는 날아가리라.” 사랑만이 헛된 삶에 의미를 불어넣고, 좌절한 무릎에 힘을 돌려주어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시킨다. 사랑은 우리의 무너지고 황폐한 삶을 무지갯빛으로 채색해 일으켜 세운다. 스스로 노력해 얻은 사랑이 불완전한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사랑을 간직한 자만이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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