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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청소와 정리, 나를 돌보는 실천



봄날 햇볕이 따스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하루 종일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선다. 미세먼지 없는 날을 골라 겨우내 묵은 먼지를 내보내고, 신선한 바람이 집 안을 휘젓게 하고 싶다.



청소기를 돌리고 총채를 들어 구석구석 켜켜로 쌓인 먼지를 쓸고 떤 후, 깨끗한 손걸레에 물을 묻혀서 책꽂이, 소파, 의자, 책상, 장식장 위아래를 말끔히 닦아내고 싶다.



무엇보다 마법이라도 부려서 곳곳에 쌓아둔 책과 음반, 바닥으로 넘쳐흐르는 옷가지, 여기저기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한순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고 싶다.



청소는 소(掃, 비를 들고 사당을 정화하는 일)를 행해서 더러움을 씻어내 깨끗하게 만드는 신성한 일이고, 정리는 정(整, 튀어나온 가지를 쳐내는 일)을 행해 우리 삶에 생겨난 어지러움을 청산하고 옥처럼 아름다운 질서를 드러내는 일이다.



한 해의 일이 시작되는 봄의 첫머리에 청소와 정리를 행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집 안에 쌓인 온갖 삿된 것들을 정화함으로써 재앙을 막고, 봄의 분출하는 생명력을 불러들임으로써 움츠렸던 몸을 북돋우며, 흐트러진 삶의 자리를 정돈해서 한 해를 건강히, 무사히 보내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열렬히 살수록, 삶의 변화, 즉 무질서는 피할 수 없다. 운동은 변화를 낳기 때문이다.



큰 노력을 들여 집을 아름답게 꾸민 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둘러보면 집 안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다.



‘사용 후 제자리’로 돌리려 주의를 기울여도, 사물들은 책상에서 내려와 침대나 소파 밑에 숨어들고, 서랍에서 튀어나와 사방으로 기어 다니고, 책장에서 넘쳐흘러 방바닥 곳곳에 흩어진다.



『철학은 어떻게 정리정돈을 돕는가』(어크로스, 2012)에서 독일 철학자 이나 슈미트가 말했듯, “사물들은 우리의 질서 관념에 저항하고, 이죽거리면서 우리가 마련한 틀을 부순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잘 설계된 계획이나 짜놓은 줄거리대로 진행되기보다 우발적 변화와 돌발적 사건에 흔들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무리 애써도 인생도, 사물도 좀처럼 내가 바라는 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제멋대로 흩어져서 난장으로 변한다.



난장을 고대 히브리어로 토후바보후(tohuwabohu)라고 한다. 이 말은 ‘시급히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엄청난 혼란’을 뜻한다.



루터는 토후바보후를 ‘황량하고 공허한’ 세상을 뜻할 때 사용했다. 의미(신)를 잃어버린 삶, 지도를 상실한 인생도 여기 속할 것이다.



난장이 된 삶은 인간을 불행과 허무의 늪에 떨어뜨린다. 질서를 잃어버린 삶, 산만하고 엇나간 인생은 쉽게 창조성을 상실한다.



슈미트는 말한다. “어질러진 공간은 뜻밖의 손님을 맞을 수 없고 엉클어진 머릿속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어설 수 없다.”



주어진 공간은 비좁기 그지없고, 타고난 두뇌엔 한계가 있으며, 살아갈 시간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기 때문이다.



강박적 축적은 물건의 잦은 분실을 낳고, 망각 없는 기억은 질 나쁜 사유로 이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관계와 사건의 무한 범람은 결국 인생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창조성을 발휘하려면, “방을 자유롭게 숨 쉬고 생각하고 계발하고 휴식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신이 혼돈에 빛을 던져 만물이 생육할 세상을 만들었듯, 삶의 난장을 정돈하고 해소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은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면 반드시 할 일이다.



청소와 정리는 자신을 돌보는 강력한 실천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청소를 하면서 흔히 우리는 인생을 연주하는 추억 놀이로 빠지기 때문이다.



많은 물건에는 소중한 한때가 깃들어 있다. 물건을 정리해 버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스러지는 아쉬움과 기억 한 조각이 소멸하는 섬뜩함이 찾아든다.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게 어쩐지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떠나보낼 물건과 애틋한 대화를 반복하다 보면 정리도 제대로 못 한 채 하루가 순간이다.



그러나 친숙한 사물과의 대화는 흩어진 생각을 가지런히 하고 어긋난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무질서의 냇물을 체치고 무의미의 옥돌을 내려쳐 삶의 순금 부분을 끄집어낸다.



청소와 정리를 통해서 우리는 무한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인생 전체가 난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삶의 의미를 다시 기운다. 슈미트는 말한다.



“건강한 질서의 기초는 커다란 쓰레기통이다. 삶에 질서를 부여하려 노력한다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내면의 목소리와 당당하게 함께할 수 있다.”



청소와 정리는 말끔한 책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 서사를 다시 쓰려고 행하는 일이다. 청소가 끝나면 주변뿐 아니라 인생도 개운해진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창문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깊은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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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럭스맨> 인문학 칼럼입니다.



글은 이렇게 썼으나, 제 방은 정말 시급한 정리가 필요합니다......ㅜㅜ

 

 

이나 슈미트, 『철학은 어떻게 정리정돈을 돕는가』, 장혜경 옮김(어크로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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