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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인간은 누구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갓생(God生).

신(God)처럼 완벽해 모범이 되는 삶을 말한다. 갓생을 사는 이들은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늘 부지런히 생산적으로 삶을 꾸려 간다. 그 결과는 사회적 성공, 특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돈이다.

임태우 감독의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서 처음 이 말을 접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갓생의 열정적 삶은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은’ 드라마 주인공 남금필의 비루한 삶과 대비돼 역설적 긴장을 일으킨다.

40대 중반의 남금필은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면서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운다. 억대 연봉을 버는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 갓생을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무런 재능도 없고 꾸준한 노력조차 안 하는 그가 과연 두 번째 인생에서는 갓생을 살 수 있을까. 신의 저울은 공정하므로 당연히 불가능하다. 태블릿PC 하나를 끼고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서 능청을 떨지만, 현실은 아버지한테 구박받고 딸에게 용돈을 빌려 쓰는 백수일 뿐이다.

그런데 원작인 아오노 슌주의 만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세미콜론)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희화화된 이 허풍쟁이 인물이 은근한 매력으로 마음을 끌어들인다. 그의 얼굴에 겹쳐져 서서히 우리 자신의 얼굴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사실 ‘아직 최선’이야말로 우리가 늘 입에 붙이고 사는 말이 아닌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에서 비판했듯,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전체가 갓생을 추구하는 ‘자기 착취 사회’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무한한 긍정성이 이 사회의 지배 문화이고, ‘나도 할 수 있음’이 이 사회의 인생 지침이다. 갓생의 착각에 사로잡혀 누구나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최선’의 결과는 우울증이거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소진 증후군 등이다.

우울증은 ‘더 이상 할 수 없음’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음’이고, ADHD는 ‘더 할 수 있음’ ‘전부 할 수 있음’이다. 소진 증후군은 심신이 망가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다가 완전히 타 버린 후 영혼이 재만 남은 상태다.

한병철은 인간이 파괴적 자책과 자학에 떨어질 정도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다. 아무리 애쓴다 해도 뭐든지 가능할 리도, 전부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전능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 아니다.

고대 희랍인은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어 신처럼 행동하려는 오만한 마음을 휘브리스(hybris)라고 불렀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도 휘브리스에 사로잡히면 무참한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인간 중 가장 용감했던 아킬레우스도, 스핑크스를 무찌를 지혜를 갖췄던 오이디푸스도 예외는 없었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처럼 행동하는 오만한 인간은 미망에 빠져서 모두 파멸에 이른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은 인간을 패배자로 만든다. 남들보다 빠르거나 늦을 뿐, 결국에는 행동 과잉이거나 우울해지거나 소진되는 것이다. 이것이 갓생의 참 얼굴이다.

드라마는 우리한테 묻는다.

내세울 것 없이 사는 우리 천덕꾸러기 인생은 남금필처럼 유쾌하면 안 될까. 남부러운 성공이 없었던 우리 구박데기 삶은 즐거우면 안 될까.

갓생을 살면 소진돼 우울증에 시달리다 비참한 종말을 맞고, 갓생이 아닌 삶은 전혀 존중받지 못한 채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 시대의 삶은 너무 슬프고 허망할 뿐이다.

그러나 삶이란 전능과 무능만 있는 게 아니다. 전능과 무능 사이엔 타고난 운명, 즉 분수를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즐겁게, 지혜롭게 살아가는 현능(賢能)도 있다.

위대함이 없고 지질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바랄 때만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인생도 존중받는 날까지 우리는 모두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을 외칠 것이다. 인간의 삶은 갓생이 아니라 ‘인생’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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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국민일보> 칼럼입니다.

조금 수정했습니다.

임태우 감독의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박해준, 김갑수, 박정연 출연)

 

아오노 슌주의 만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세미콜론)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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