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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읽기에 대하여

독서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같이 읽고 함께 사는 삶을 찾아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


독자들을 실감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였다. 편집자들은 솔직히 말하면 독자를 잘 모른다. 편집자로 일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이 격절, 독자로부터의 소외는 심해진다. 때때로 저자 강연회, 사인회, 애독자 모임 등에서 독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관계자 입장이니 선뜻 속마음을 듣기가 어렵다. 독자들은 늘 저 너머에 있다. 책은 분명히 독자들한테 가 닿지만, 독자들은 항상 모니터 건너편이나 판매부수 이면에 흔적으로 존재한다. 

편집자는 스스로 자기 분야 책들의 독자가 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격차가 섬뜩할 정도로 벌어지곤 한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과 독자가 읽으려는 책이 천만리 멀어지는 것이다. 나가던 책이 안 나가고, 팔리던 책들이 줄어든다. 초판 부수와 판매 부수 사이의 간격이 커지거나 판매 기간이 늘면서 자본이 창고에 종이로 고인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출판의 일반적 상황일지도 모른다.

독자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까.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전국 어디에나 있지만, 나한테 독서와 관련한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줄 이들은 누구일까. 책을 왜 읽고, 어떻게 읽고, 언제 읽고, 어디에서 읽을까. 두 해 한 번 조사해 발표되는 「국민독서실태조사」에도 관련한 답이 있지만, 숫자는 추상적이다. 열심히 들여다보고 고민하지만, 언제나 실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넘쳐 나는 책 관련 포스트나, 인터넷서점의 서평 또는 댓글도 마찬가지다. 관심 있는 책이 있으면, 전체를 꾸준히 뒤지고 살펴서 인사이트를 발견하곤 하지만, 아무래도 부족하다. 독자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열망이 점점 커져 가던 차에 마침 회사를 쉬게 되어, 전국의 독서공동체를 일일이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기획으로 실행되었다. 2016년 한 해 동안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도움을 받고 《한국일보》의 지면을 빌려서 서울, 인천, 경기, 제주, 청주, 김해, 전주, 원주, 보령, 홍성, 나주, 순천 등 전국 곳곳에 있는 오래된 독서공동체들을 방문해 회원들과 인터뷰한 후 연재했다. 작년에는 보론을 덧붙여 『같이 읽고 함께 살다 ― 한국의 독서공동체를 찾아서』(느티나무책방, 2018)라는 책으로 엮었다. 

짧으면 두세 시간, 길어야 예닐곱 시간 정도 되는 만남이었기에 속이야기를 충분하게 나누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하지만 디지털 정보의 힘이 세상 전체로 확장되는 중에도, 멀리에서 또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책을 읽어 온 이들의 마음이 선연히 느껴졌고, 만남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가슴에 불꽃같은 것이 이는 기분이었다. 독서공동체에 참여하는 독자들한테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의 전달 수단만은 아니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에게 책은 자아를 특정하게 훈련하는 수단이고, 세계를 보게 하는 틀이며, 무엇보다 인간을 공생의 존재로 엮어 주는 끈이다. 디지털 정보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지는 초연결성은 출판을 완벽하게 바꾸겠지만, 책을 소멸시키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인간은 도무지 책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장은수,『같이 읽고 함께 살다 ― 한국의 독서공동체를 찾아서』(느티나무책방, 2018). 제 책입니다. 먾이 사 주세요^^;;;


강한 연결을 활성화시키는 독서공동체


독서공동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편집자로서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독자의 위상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특히 그렇다.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는 자발적인 독자라는 점, 적어도 한 달에 한 권 이상 책을 읽는 습관적 독자라는 점, 무엇보다 독서를 자신만 향유하는 취미 실천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여기는 운동가라는 점. 이들은 좋은 저자를 격려하는 든든한 후원자이고, 지역의 서점과 도서관의 운영을 밑받침하는 탄탄한 지지자이고, 이른바 ‘기본 부수’를 만들어 주는 편집자의 친구이다. 이들이 없다면 책 생태계의 연결고리는 분명히 끊어질 것이다. 이들은 책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책을 소통의 재료로 삼아 지역사회에 파고든다. 이들의 활동이 거세질수록, 지역사회는 대화하는 민주주의, 성찰하는 민주주의가 일상에까지 파고드는 독서 친화적 세계로 바뀌어 간다. 소셜미디어가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을 만나게 하는 ‘약한 연결’을 지향한다면, 독서공동체는 생활세계를 공유하면서 지역사회의 쟁점들을 함께 고민하는 ‘강한 연결’을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독자와 편집자와 작가는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연결되었지만, 관계의 강도 자체는 현격히 떨어졌다.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다수의 약한 연결들이 인생에 실감을 가져오는 소수의 강한 연결을 대체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놀이를 즐길수록, 유튜브에서 동영상 구독을 늘릴수록, 사람들은 신기루 같은 관계의 공허에 중독된다. 그리하여 진정한 관계를 단 한 차례라도 속 시원히 체험하기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더 자주 접속하고 더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일차원적 콘텐츠에 중독된다. 올 듯 말 듯한 종말 때문에 종교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공허를 치유하는 일은 독서공동체의 가장 확실한 존재 이유 중 하나다. 노원구에서 만난 한 주부는 말했다. “매주 모임에 나오니까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말고 소속감이 생겨서 참 좋아요.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깊이 사람을 사귄 적이 없었는데, 책 마실 나와서 수다 떨고 나들이도 같이 다니면서 정이 아주 깊어졌습니다.”


타자와 감각을 공유하는 실천


한국사회는 공동체성이 통째로 뿌리 뽑혀 있다. 특히 대도시 지역은 아주 심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태어난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얻어서 은퇴하는 시대는 저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강한 연결’이 좀처럼 형성되지 않는다. ‘강한 연결’은 삶을 함께 나누는 지속적 훈련 없이 이룩되지 않는다. 아무나 부부의 연을 맺고, 누구나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삶을 함께하면서 공동의 추구를 행할 때에야 비로소 ‘강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독서공동체는 인생에 실감을 가져오고 의미를 불어넣는 ‘강한 연결’의 거멀못이 된다. 읽기-말하기-듣기-활동하기로 이루어지는 네 박자 반복이 우리 삶의 감각을 타자를 향해 개방시키고, 우리를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함께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존재로 만든다.

물론 책은 혼자서 읽어도 대화적 성격을 띤다. 독서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비루한 삶과 우리가 바라는 의미 있는 삶 사이에 책을 가져다 두는 일이다. 독서 과정에서 우리는 책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고쳐서 하는데, 이 과정이 반복되면 마침내 자신이 수많은 타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책은 고독한 단독자로서 직립한다고 착각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필연적 공생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자기 안에 있는 어느 한 부분도 타자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음을, 나의 자아가 타자의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책을 읽을 때마다, 특히 시나 소설 등의 문학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놀라는가. 내가 겪은 일들 전체를 누군가 이미 다 경험한 듯한 기분을,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남들이 다 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거대한 이야기에 홑소리 하나를 간신히 더해 자신의 의미를 이룩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건대, 책은 지식과 정보의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책은 차라리 나의 진짜 얼굴을 알려주는 거울에 가깝다. 내가 현재까지 이르러 멈춘 자리와 아직 가지 못한 길을 선연히 드러낸다. 책을 통해 인간은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객관화할 수 없는 인간은 사회적일 수 없다. 그런데 독서는 이 어려운 일을 아주 손쉽게 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런데 독서공동체를 이루어 책을 같이 읽는 일은 더욱 큰 경이를 불러일으킨다.

책을 같이 읽으면, 저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나’를 친구로 만난다. 아아, 이 땅에서 우리는 얼마나 닮았는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자리에 밑줄을 치고, 같은 사건에 마음이 동한다. 조금쯤 차이가 나더라도 상관없다. 두어 시간 동안 열렬히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의 체험이 우리를 ‘따로 또 같이’의 삶으로 이끈다. 책에 담긴 내용과 이에 대한 감상을 빌미로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 모두 비슷한 삶의 경로를 비슷하게 밟아 왔음을 깨닫는다. 슬픔과 기쁨, 불안과 평온, 절망과 희망, 상처와 치유의 교차로에서 누구나 전자로부터 후자를 이룩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우리 삶은 개별적이지만 우리 운명은 비슷하고, 우리 체험은 혼자서 누적하지만 우리 감각은 공동으로 이룩된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비인간적 세상의 바다 위에서 섬처럼 고립된 혼자가 아님을 알아간다.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어쩌면 기적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이미 일어난다. 책을 읽고서 모임에 나가 할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느낌을 모두의 목소리로 만드는 일을 연습한다. 여기서 지위와 지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터나 집안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 듯, 타자를 배려해 말하고 타자와 공명하며 경청하는 일이야말로 저만 아는 아이처럼 살아가던 인간을 모두를 위한 생각을 하는 어른으로 만든다.

사실, 우주에는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다. 인간은 우발적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누구한데 부탁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요 할 일이 있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우리 존재는 완벽하게 부조리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주에는 법칙이 있을 뿐 의미는 없는 반면, 인생에는 법칙은 없지만 의미는 있다. 우주 한복판에 부조리로 던져진 인간이 조리를 이룩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다. 『떨림과 울림』(동아시아, 2018)을 쓴 김상욱은 “인간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고민하는 새로운 ‘입자덩어리’”라는 말로 이 사태를 요약한다. 『라이프 3.0』(동아시아, 2017)에서 막스 테그마크는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센티엔스’라고 부른다. 인간의 유적 본성은 슬기가 아니라 보람이라는 것이다. 우주에는 “행복도, 선량함도, 아름다움도, 의미도, 목적도 없고 단지 공간의 천문학적 낭비만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행복과 선량함과 아름다움과 의미와 목적이 없다면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 세상에 조리를 불어넣겠다고, 세계를 더 가치 있게 하겠다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노력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의미란 무엇인가. 물리적 실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정신적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가. 타자와 공명하는 일에서, 즉 감각의 주파수를 공유하는 데에서 온다. 의미는 한마디로 공통 감각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자신의 타고난 무의미를 희생해 타자와 공유할 만한 가치를 생성하는 일이며, 타자가 삶을 던져 이룩한 가치를 나의 감각으로 느끼는 일이다. 책을 같이 읽음으로써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독서공동체는 공감각의 훈련장이다. 자신의 욕구만을 좇는 무의미하고 이기적인 자아를 공생을 생각하는 의미 있고 이타적인 자아로 변형하는 실천이다. 전주에서 만난 한 청년은 말했다. “책 읽고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제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제 안에서 선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욕망을 좇아서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게’를 생각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를 생각하면서 끝없이 타자와 공명하려 애쓰는 것, 이것이 바로 같이 읽기의 핵심적 실체다. 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조선시대 선비들을 보라. 입으로 수양을 떠들면서 한시도 거르지 않고 글을 읽었지만, 조선을 끝내 가혹한 착취와 잔혹한 처우가 일상이 된 신분제, 가부장제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들한테 무엇이 부족했던가. 신분과 처지와 살아온 이력이 달랐던 사람들과 감각을 부단히 나누지 못했던 점이다. 이들의 공부는 대부분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거나 음풍농월을 위한 도구에서 그쳤다. ‘같이 읽고 함께 살기’를 고민하면서 공생의 삶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타자를 생각하는 인간, 즉 성인(聖人)이 될 수 없다. 독서공동체를 이루어 책을 같이 읽는 일은 이기적 인간으로 태어나 이타적 성인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다.


《기획회의》 제484호(2019년 3월 20일) 특집 ‘책 안 팔리는데, 독서모임 왜 뜰까?’.


독서공동체는 학습공동체가 아니다


따라서 독서공동체는 쟁론공동체 또는 학습공동체가 아니다. 쟁론의 기술을 배우고 공부를 깊이 하려는 것은 독서공동체가 아니다. 앎을 명료히 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면, 차라리 좋은 스승을 모시고 강의를 듣거나 고요히 여러 책을 살피면서 숙고하는 쪽이 낫다. 독서공동체는 책을 매개로 해서 자신의 느낌을 공유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지혜를 이룩하는 곳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인천 마중물을 이끄는 한 선생님은 말했다. “지식을 많이 갖춘 분은 말을 잘 못하고, 살면서 치열한 고민을 많이 하던 분이 강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단련되면서 얻은 자기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야말로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솔직하고 주관이 뚜렷하지만, 다른 사람들 의견을 존중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를 고집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차이의 지혜를 획득하신 거죠.”

독서는 위대하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혼자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마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독서독인』에서 박홍규 선생이 주장한 것처럼, 독서에 빠진 인간이 때때로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인류 최악의 참사를 불러온 히틀러, 스탈린 등은 독서광이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타자와 감각을 공유하는 실천을 통해서만 인간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같이 읽기는 물질에 빠져 행복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를 구원한다. ‘차이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공감’과 ‘경청’을 디딤돌 삼아 세상을 의미 있게 하려는 이들을 증가시킨다. 독서공동체가 많은 사회는 분명히 좋은 삶을 살아가는 힘을 축적할 수 있다. 독일이나 북구의 복지국가들이 독서공동체 지원에 예산을 아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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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484호(2019년 3월 20일) 특집 책 안 팔리는데, 독서모임 왜 뜰까?’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 특집에는 후배인 김유정의 「출판사와 독서모임의 연결고리 만들기」라는 출판 편집자, 마케터를 위한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습니다.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