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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책 읽기

경제 앞에 정의부터 세우라 ―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까



경제 앞에 정의부터 세우라

― 덤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까

조너선 B. 화이트, 『애덤 스미스 구하기』(이경식 옮김, 북스토리, 2007)


‘보이지 않는 손’은 또다시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레이건과 대처의 정치경제, 즉 “안정화하라–자유화하라–민영화하라”(S-L-P, Stabilize! Liberate! Privatize!)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해 한때 전 세계에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사회’라는 제어장치를 상실하고 저 홀로 폭주한 끝에, 극소수에게 전 세계의 부가 집중되는 ‘대격차’라는 처참한 현실을 낳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와 더불어 도덕적으로 완벽한 파산을 맞이했다. 그 이후, 지난 10년 동안 세계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갖가지 모색을 통해 정치경제의 새로운 작동 방식을 찾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중이다. 

한국 역시 이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올해 있을 대선의 핵심 과제가 ‘격차 해소’와 ‘공정성 회복’에 초점이 놓인 것은 주지의 일이다. 이는 국가 부도 사태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 정치경제로는, 즉 무조건적 ‘자유 시장’에 기반을 둔 경제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굴릴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결집한 결과다. ‘시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 무엇을 더해야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중대한 의제다.

주로 영미 쪽 분위기지만, ‘자본주의 구하기’라는 전 세계적 의제를 둘러싼 탐구와 모색의 와중에 가장 자주 호출되는 이름이 애덤 스미스다. 일종의 결자해지라고 할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과학적 작동 원리를 정립한 인물이 ‘시장의 폭주’는 자기 뜻이 아니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해결사로 역사의 전면에 또다시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봉건 억압 경제에 맞서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려고, 이번엔 시장의 잘못을 치유할 수 있는 ‘도덕’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국부론』만이 아니라 『도덕감정론』을 함께 읽어 달라고 애타게 호소하면서. 

그 요점은 도덕을 기초로 할 때, 즉 사회 정의의 통제를 받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은 가장 ‘자유롭게’ 작동하며, 시장은 사회에 가장 ‘큰’ 이윤을 돌려준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역설을 좋아했다는데, 이것은 정녕 ‘위대한 역설’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구원자로 『도덕감정론』의 애덤 스미스를 다루는 책은 2015년 이후 한국에서 꾸준히 출간되어 왔다.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곡해된 애덤 스미스의 자유경제』,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 등이 그 목록에 속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크게 보면 그 흐름에 속하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누구나 읽기 쉽게 쓰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덕목이 있다. 

자동차 수리공의 영혼에 빙의해서 나타난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그동안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아주 끔찍한 존재로 여기고 있어. 마치 괴물처럼 말이야. 내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단 말이지.” 

스미스를 괴물로 만든 것은 ‘자유 시장’이라는 상거래 체계에 대한 완벽한 오해, 즉 “시장이라는 것은 절대로 사람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은 시장을 가능하게 하는 접착제이고, 또 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망각이다.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부의 축적을 바란다고 해서 인생에 그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부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 즉 행복을 바란다. 스미스의 말대로, “물질적 발전뿐만 아니라 도덕적 성숙을 완성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싶어 한다. 

물론,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는 사람이 고상함을 문제로 삼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디오게네스처럼, 사람은 한 줄기 햇빛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건강하고, 빚이 없고, 명료한 의식을 가진 사람”의 행복은 재산이 더 증가한다고 해서 늘어나지 않는다. 

행복은 부의 원리에 따라 증감하지 않는다. 행복은 다른 원리, 즉 도덕의 원리를 따라 작동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훌륭하다고 인정할 때, 더 나아가 우리 내면의 관찰자가 자신을 흐뭇해할 때 행복함을 느낀다. 부의 증가가 소수만을 만족시킬 뿐 대다수 인간을 불행에 빠뜨린다면, 사회는 붕괴한다. 

“인류가 도덕 규칙을 받들지 않는다면 사회는 결국 소멸해 버린다.” 

스미스에 따르면, 시장이 작동하는 것은 ‘이기심’ 때문이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내버려둘 때 시장은 부를 가장 크게 증가시킨다. 이것이 『국부론』의 요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할 때 경제학자들이, 고의적이든 아니든, 빠뜨린 것이 있다. 

시장은 사회 안에 있다. 인간 사회는 “야비하고 이기적으로” “도덕관념이 없는 개인들이 모여 있는 어떤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도덕을 중시하고” “양심이 개인의 행동을 구속하는 세상”에 존재한다. “인간 행동의 ‘우아하고 관대한’ 측면을 무시하는 경제학은 필연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경제학자가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할 때에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도덕을 모르고 폭주해서 세계를 위기에 빠뜨린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S-L-P’의 앞머리에 ‘J’(Justice)를 세우자고 제안한다. “정의는 시장의 안정화와 자유화와 민영화를 통해 전체적인 효율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의 전제조건이자 초석”이라고 말한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고민한다면, 귀 기울여 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