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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만드는 일

편집의 귀환 _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생각하다 (한국일보)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갔다 온 후 한국일보에 발표했던 칼럼입니다. 여기에 옮겨 둡니다.



아무도 책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출판의 미래는 누구나 고민한다. 올해 프랑크푸르트도서전 분위기를 이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민은 열정을 낳고, 열정은 모험을 낳는다. 그 모험을 자극하고 현실화하려고 조직위는 작년부터 비즈니스클럽을 열었다. 전 세계 출판인을 불러 모아 최신 출판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을 소개하며, 서로 깊게 교류하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 출판의 주요 이슈는 디지털 충격을 중심으로 크게 여덟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전자책을 비롯한 디지털 출판이 출판의 전 지형을 바꾸고 있다. 둘째, 자가 출판이 활성화되면서 저자의 독립성이 높아진다. 셋째, 온라인 또는 모바일 판매가 늘어나면서 지역 서점은 줄어든다. 넷째, 책 소비의 본질이 변하면서 발견성이 문제로 부각된다. 다섯째, 빅데이터 등 기술 기반의 새로운 마케팅 방법이 활용된다. 여섯째, 전자책 구독 모델이 출판의 새로운 수익원이 된다. 일곱째,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다른 미디어와 경쟁이 치열하다. 여덟째, 소비자 행위를 분석해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출판의 임무다. 

가장 중요한 현상은 독립 지역서점의 감소와 온라인(아마존) 독점의 심화다. 서점 감소는 배본을 중심으로 신간의 판매망을 확보해 왔던 출판사의 관행적 마케팅 전략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막대한 숫자의 독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온라인서점이 이를 기반으로 해서 자가출판 등 콘텐츠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책 콘텐츠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책의 소비를 둘러싼 독자행태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출판사는 ‘발견성’을 확보하고 판매를 끌어올리려고 소셜미디어 등을 활용해 독자와 긴밀한 소통구조를 구축하고 판매채널을 직접 운영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이는 출판의 양극화 현상을 점점 가속화한다. 먼저 독자를 매혹하는 질 높은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독자와 직접 소통하고 판매까지 해내기 위해 지속적 인수합병을 통해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려는 슈퍼자이언트의 시대가 온다. 전 세계에 걸쳐 독자 정보를 모아들이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기술적으로 분석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와 반대쪽에서는 지속적 세분화를 통해 다양한 틈새시장을 지배하려는 소출판사들의 전략적 시도들이 늘어난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수많은 플랫폼을 넘나들면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출판이 나타난다. 이런 환경에서는 저자도 편집 및 디자인 서비스 회사 등의 도움을 받아 작은 출판사처럼 움직일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필연적으로 큰 출판사는 더 크게, 작은 출판사는 더 작게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 출판의 빅트렌드다. 

하지만 독자를 직접 상대하더라도 출판사는 서점일 수 없다. 아셰트의 최고경영자 아르노 누리가 말한 바처럼, 소매는 출판의 유전자가 아니다. 출판의 본질은 큐레이션, 즉 독자를 대신해서 질 높은 콘텐츠를 선별하는 것이다. 독자를 깊이 이해하고 품격을 높여주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 말고는 무엇으로도 기술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 ‘편집의 귀환’ 외에는 출판사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번에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활약한 퍼블리 같은 콘텐츠 기반 스타트업의 등장, 레진코믹스 같은 편집력과 기술력이 결합한 임프린트 플랫폼의 확산이 출판의 미래에 뚜렷한 대안이 될 게 분명하다. 물론 모노클 같은 디자인 편집력에 근거한 고품질 프린트 기반의 콘텐츠 회사들도 속속 나타날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출판은 이제야 전자책의 충격을 넘어서 첫 발을 떼었다. 이것이 올해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나타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