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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황혼의 출판과 대낮의 출판 (경향신문)

대안연구공동체의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시리즈 및 현실문화연구의 『여성혐오가 어쨌다구?』에 대해서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가 기사를 썼습니다. 제 의견이 담긴 부분이 있어서 아래에 전제합니다. ‘대낮의 출판’에 대해서는 따로 의견을 밝힌 바 있으므로, 부연하지는 않겠습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책이 황혼의 형식을 넘어 대낮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독자는 사태가 정리된 이후의 사유가 아니라, 더 빠른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처럼 이론적인 책과 『영구평화론』처럼 현실 문제에 천착하는 책을 모두 썼다”며 “현대의 책도 사유의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두꺼운 책, 짧은 시기 현장의 상황에 대한 사유를 담은 책으로 이원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래에 기사 전문을 소개합니다.



이슈 잡아라… 발길 빨라진 출판


메르스·여성혐오·성희롱 등 문제 신속 대응한 사회비평서 잇달아… 느리게 관조하던 예전과 대비

현실의 이슈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책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한 박자 느리게 관조하고 사유하던 기존 책과는 다르다.

대안연구공동체는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시리즈(길밖의길)의 첫 4권을 이달 초 내놓았다. 제도권 바깥의 철학자 4명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에 대해 진단한 결과물이다. 김재인 박사는 들뢰즈·과타리의 이론으로 국가, 자본, 메르스의 연관관계를 진단한다. 서동은 박사는 애덤 스미스를 ‘공감의 경제학자’로 분류한 뒤, 메르스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감능력 부재를 지적한다. 장의준 박사는 메르스 사태에 대응하는 좌파의 자세에 대해 아도르노, 레비나스의 이론을 경유해 묻고, 문병호 박사는 한국 사회에 메르스 사태 같은 불의와 불행이 반복되는 이유를 ‘치외법권적 예외상태’에서 찾는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 날개를 편다”고 말했다. 미네르바, 즉 지혜 혹은 철학은 사태가 지나간 뒤에야 그 사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철학자 4명은 정부가 메르스 사태의 사실상 종식을 선언하자마자 책을 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책의 형태도 기존 출판 관행에 비춰보면 파격적이다. 각권은 60~90쪽, 책 가격은 6000원에 불과하다. 책과 팸플릿의 중간 분량인 얇은 문고판이라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 대안연구공동체는 이달 중 메르스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책 4권을 펴낼 예정이며, 향후 국정원 해킹 사건 등에 대한 기획도 준비 중이다. 

지난달 출간된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현실문화)는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한 임옥희·정희진씨 등 연구자 6명의 진단을 담은 책이다. 올해 초 한 한국인 청소년이 이슬람국가(IS)에 가입하면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말을 남겼고, 이후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이슈로 떠올랐다. 출판사는 3월에 청탁해 2개월 만에 원고를 받은 후 곧바로 편집에 들어갔다. 

『출판, 노동, 목소리』(숨쉬는책공장)는 출판노동에 대한 전·현직 출판인들의 글을 묶었다. 지난해부터 몇몇 유명 출판사에서 성희롱, 부당해고, 부당노동 등의 문제가 이어지자 출판사는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을 담아내기로 했다. 책 취지를 살리기 위해 통상 속지에 표기되는 발행일, 지은이, 펴낸이 등 판권 정보를 표지에 실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의 ‘2015 출판노동 실태조사’도 수록해 이 책이 현실의 문제를 직접 건드리고 있음을 알렸다. 

이처럼 신속한 단행본 출간은 현실에 직접 개입하려는 지식인과 출판인의 뜻이 결합해 이뤄졌다. 대안연구공동체는 2011년 월가 점령 사건,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도 책을 내려고 했으나 기획·청탁·집필에 시간이 걸리는 데다 다른 출판사와 기획이 겹쳐 뜻을 접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는 “메르스 역시 끝날 기미가 보여 자칫 시간을 놓칠 것 같아 서둘러 책을 냈다”며 “이전에는 필자 1~2명의 원고만 늦어도 책을 내기 어려웠으나, 각 필자마다 적은 분량으로 따로 책을 내니 그런 부담이 없었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지식인들이 현실 문제에 긴급히 개입한 사례는 많았으나 이는 주로 계간지, 신문 등 언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계간지, 언론의 역할이 줄어들고 소셜미디어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아울러 책의 유통 주기도 짧아지면서 출판계 역시 발빠르게 움직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김수현 현실문화 편집팀장은 “책 출간 이후 2~3개월 안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면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며 “책이 기존 위상을 고수하기보다 발빠른 사회비평서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책이 황혼의 형식을 넘어 대낮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독자는 사태가 정리된 이후의 사유가 아니라, 더 빠른 정보와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 대표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처럼 이론적인 책과 『영구평화론』처럼 현실 문제에 천착하는 책을 모두 썼다”며 “현대의 책도 사유의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두꺼운 책, 짧은 시기 현장의 상황에 대한 사유를 담은 책으로 이원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