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숲으로, 골목으로……. 또, 다른 곳으로……. 그러니까 어디든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모든 시대의 문제이지만, ‘어떻게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우리 시대의 문제다.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읽든,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든,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든, 다른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행동거지는 각각 다를지라도 품은 마음과 목표는 단 하나뿐이다. 자본주의를 횡단함으로써 생명의 새로운 규칙을 찾아내기. 고래가 뭍에서 바다로 돌아갔듯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보전을 위한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한 번 더, 조금 더’에서 ‘더 이상은, 이대로는’으로 종의 윤리가 격변하는 중이다.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에 따르면, 현재 자본주의는 진보의 엠블럼에서 파멸의 상징이 되었다. 부의 전체적 증가가 사회적 행복을 가져오기는커녕 개별적 삶의 부채만을 늘리는 반동과 역행이 뚜렷해진 탓이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실물 성장 없이 숫자놀음으로 부를 늘려온 금융자본주의의 파산을,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미래 비용을 눈감은 채 이른바 ‘값싼 전기라는 이데올로기’를 공급함으로써 현세의 쾌락을 부풀려온 소비자본주의의 종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파산과 종말은 세계 곳곳을 떠돌다가 2015년 그리스에서 또다시 붕괴를 일으켰다. 한국은 언제일까.
본능으로 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파괴의 거대한 충격이 몰려오기 전에 몸을 움츠리고 이곳을 벗어나 삶의 방정식을 다르게 세우려고 애쓴다. 저출산으로 대비하고, 도심을 공동화하고, 터전을 시골로 옮겨 생활하고, 우애와 협동을 실험한다. 모두 필사적이다. 한때 자본을 통해서 또는 자본에 편승해도 잘살 수 있었던 현실은 이미 환상이 되었다. 지금은 자본에 포획되면 노예 아니면 죽음뿐이다. 그래서 자본의 포획에서 벗어나려고, 삶(생명)을 담보로, 우리는 도주 중이다. 미생(未生)이 아니라 완생(完生)을 향해. 머리를 굴리고 몸을 비틀어 자본의 그물이 성긴 쪽으로 옮기고 구멍이 생길 때마다 그곳으로 움직인다.
자본으로부터의 도주로를 개척하는 데 일본 시민들은 우리의 선배들이 되어왔다. 먼저 버블 붕괴의 파국을 맞이했고, 장기불황을 겪었으며, 오랜 저성장을 삶으로써 살아왔다. 유기농과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생산 지역소비)를 바탕에 놓은 소농(小農) 중심의 협동경제를 탐구하고, 산촌(山村)과 자급자족경제를 결합한 저생산 저소비의 산촌자본주의(里山資本主義)를 추구한다. 대안적 사고와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실천이 결합되어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니라 ‘자발적 가난 속의 풍요’를 만들고, 오랜 지방자치의 전통이 이를 떠받쳐 지역 곳곳에 비자본주의적 삶의 진지를 생성한다. 요컨대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욕망 증식의 경제로부터 벗어나 필요를 축소하고 그만큼만 생산하는 자립의 경제를 꾸준히 밀어 올린다. 저자의 말처럼, ‘확대 균형’에서 ‘축소 균형’으로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농촌도 싫고, 산촌도 싫으면, 그냥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할까. 저자 히라가와 가쓰미는 도시의 골목길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정확히 말하면, ‘골목 안 가게’에 주목한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 오로지 생존과 유지를 목적으로 낮은 성장과 작은 이윤으로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고 도시게릴라처럼 꾸준히 이어가는 장사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한 희망을 본다. 소공장이어도, 소식당이어도 상관없다. 정성을 다해 물건을 만들고 성심껏 손님을 대해 단골을 확보하면서 오로지 계속 존속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 이 오래된 미래의 이름을 저자는 ‘소상(小商)’이라고 부른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이들을 망하게 하고 상권을 독점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려 하지만, 이들은 그 틈새를 벌려가면서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백화점이 들어서면 주변에 옷가게 거리가 오히려 생겨나듯이 말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소상’은 사업 규모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업의 운영원리에 가깝다. 소상이란 “제품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정성껏 만들어내는 생산 라인, 그것을 고객에게 보내 신뢰와 만족도를 피드백시키는 시스템이다. 확대보다 지속을, 단기적인 이익보다 현장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노동의 의미나 기쁨을 음미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드는 것, 그것이 삶의 긍지로 이어져 날마다 노동현장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나는 회사”를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순간 온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성심을 다해 판매하는 장인경제 시스템, 즉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 경영을 말한다.
이 책은 분명히 선언적인 한계를 갖는다. 자본의 가공할 운동 앞에서 ‘장인성’이란 얼마나 미약한 힘인가. 그러나 자본과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려는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 없는 사회’에서 간신히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후세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의무를 감당하려는 마음을 ‘어른다움’이라고 한다. 그러니 건강을 위해 사탕을 참을 줄 아는 어른이 될 것인가, 더 달라고 계속 칭얼거리는 아이가 될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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