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驚異).
놀랍고 신기하다. 감각이 깨어나고 몸이 풀리면서 상념이 융기한다. 문장들이 누적되고 페이지들이 모이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낯선 지형을 머릿속에 만들어낸다. 이 지형도에는 ‘감정의 철학’ 또는 ‘감정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리라. 이성의 사유가 아직 제대로 개척하지 못한, 때로는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때로는 처치 곤란으로 미루어둔 광대한 황무지. 마음의 지층으로 볼 때 이성보다 아래쪽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어둠에 남겨진 영역. ‘감정’이라는 이름의 신대륙이 마침내 지적도를 얻었다.
사흘에 걸쳐 1400쪽에 이르는 책을 모두 읽었다. 역시 마사 누스바움이다. 그녀의 책은 지금까지 한 차례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시적 정의』, 『혐오와 수치심』은 출간될 때마다 한국의 지식 세계에 사유의 풍요를 공급했고, 입을 타고 조금씩 옮겨지면서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감정의 격동』(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은 이 모든 책을 포괄한다. 어찌 보면 다른 저술들은 이 걸작의 부산물이자 세밀한 주석을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책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이성을 중심으로 흘러온 서양철학 전체에 대한 반성적 재구축이자 도전이고, 감정이라는 뜨거운 도가니에 사유 전체가 함께 녹아 끓어오르는 융합이자 통섭이다.
누스바움은 법철학자다. 사회 어느 영역보다도 법은 이성과 합리의 영지이면서 사적인 이해관심을 허용하지 않는 제도와 절차의 세상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의의 여신은 저울과 칼을 들었을 뿐 눈물이 없다. 눈을 가린 채 죄를 재고 칼을 휘두르는 법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법관을 무정한 괴물처럼 흔히 행하도록 만든다. 이는 동시에 현대의 작동원리이기도 하다. 정(情)을 배제한 이(理)로써 사회 전 영역을 집어삼킨 현대적 세계관은 후쿠시마 사태가 보여주듯이 그 적절함을 잃으면서 오늘에는 더 이상 스스로 감당하고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적 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해골처럼 뼈만 남아버린 현대 사회의 법과 제도에 사랑과 연민을 불어넣으려고 한다. ‘박애’ 없이는 어떤 사회든 ‘자유’와 ‘평등’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사마천이 『사기』에 「혹리열전(酷吏列傳)」을 두어 ‘인정은 모르고 법만 아는 바보들’의 삶을 기술함으로써 법치의 위험을 경계한 뜻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다.
누스바움은 말한다. “민주주의는 마음과 상상력의 교육 없이 법률과 제도만으로 평등을 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곧이어 덧붙인다. “우리는 온갖 다양한 사람의 삶 속에 시적으로 거주하는 자로서의 민주주의 지도자라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시를 아는 사람, 즉 타자를 연민(공감)할 줄 아는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할 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누스바움은 “적절한 윤리 이론의 개발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적절한 감정 이론을 개발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세우고 고대 스토아학파로부터 현대 생물학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을 가로지르면서 감정을 탐구한다. 하나의 질문에 시작해서 곁가지를 치고, 또 다른 질문을 연속해서 뽑아내면서 답변을 시도하는 특유의 서술법 덕분에 책은 무척 두툼해졌지만, 덕분에 우리는 사유의 작은 공백조차도 없이 감정과 관련한 모든 부문을 훌륭하게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감정의 발달이 없으면 우리가 정치적 생명체로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일부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감정은 “생명체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본질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감정이란 감각의 순간적이고 위험한 분출이며 이성이 통제하고 지양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 특별한 사유로서 그 자체로 훌륭하고 바람직한 삶 또는 애착하는 대상에 대한 지향을 포함한다. 감정은 “실제로는 내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자족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부터 느끼는 슬픔처럼, 감정이란 흔히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내 삶에 온전하게 실현할 수 없는 사태(어머니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일)에 대한 운명적, 필연적 좌절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감정은 행복의 실현을 가로막는 세계를 정직하게 응시하면서 나 홀로는 어찌할 수 없기에 타자를 연민하고 사랑하는 힘을 배양하는 실천으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감정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사유이자 실천 윤리’가 된다.
『감정의 격동』이 1권의 이론적 정초, 2권의 정치적 실천, 3권의 미학적 탐구로 이어지는 것은 이런 뜻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체험에 기반을 두고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골고루 넘나드는 저자의 박람강기를 보여주는 2권 ‘연민’과 3권 ‘사랑의 등정’이야말로 어찌 보면 이 책의 백미에 해당한다. 감정에 대한 이론적 논증을 슬쩍 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2권과 3권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2권에서 누스바움은 애덤 스미스, 니체, 스피노자 등의 감정론을 한계 지으면서 ‘연민(공감)’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법 등 우리의 공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촉발한다. 가령, 전염병의 확산에 절차적 관련성이 없다고 해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전 사회적 불행에 대한 연민이 결여된 것으로 분노를 일으킬 뿐이다. 누스바움은 공적 삶에서 감정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파국을 피하는 지혜를 배양하려 한다.
개인적으로는 3권 ‘사랑의 등정’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이 부분은 ‘사랑의 사상사’이자 ‘문학과 예술의 애정사’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플라톤에서 출발해서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브론테, 말러, 휘트먼, 조이스로 이어지는 긴 목록을 섭렵하면서 인류사에서 사랑이 더 높은 곳으로 등정하는 도약대들을 살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헌신하는 일들의 고결함을 믿고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려는 의지 자체에 의해 증오심을 물리친다.” 세상에 만연한 증오를 이기려면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감정의 격동』이 인류의 여정 전체를 성찰한 후에 마침내 닻을 내린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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