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르면, 정의(正義)란 기본적으로 “사물의 공정한 분배”를 뜻한다. 정의란 언제나 “분배”를 따지는 실천이고, 따라서 그 한 갈래인 사법 정의란 “마땅히 벌해야 할 이들에게 죄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이마미치 도모노부, 『단테 신곡 강의』) 이것이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는 눈을 가린 채, 한 손에 저울을, 한 손에 칼을 든 이유일 것이다. 죄를 저지른 자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공정함과 엄정함을 무기로 법을 집행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뜻이다.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는 오늘날 미국에서 ‘정의의 여신’이 어떻게 돈 앞에서 눈을 뜨게 되었는가를 그 뿌리까지 파헤친 르포르타주 논픽션이다. ‘빈부 격차 시대의 미국의 부정의’라는 영문판 부제가 잘 드러내듯, 이 책은 미국의 사법시스템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마(大馬)들, 즉 다국적 기업들을 상대할 때와, 생계선을 넘나들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할 때 얼마나 차별적으로 작동하는지를 폭로한다. 그 실태는 끔찍하고 충격적이면서, 어쩐지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어서 무척 마음이 불편하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사법시스템은 “법치주의는 서서히 퇴색해 가고, 그 대신에 실패한 자, 가난한 자, 약한 자를 범죄자로 몰아가고 강한 자, 부유한 자, 성공한 자의 위법 행위를 눈감아 주는 방향으로 설계된 특이하고 거대한 관료주의가 서서히 강화되어 왔다.”
먼저,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에 대한 사법적 공격은 점차 강도를 높여가면서 진행되었다. 임의동행, 불심검문, 이민자 강제추방, 경범죄 덮씌우기, 검거할당제 등 시민으로서의 기본 인권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가 법의 이름 아래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나고 있다. 가령, 한밤중에 여자 친구 집 앞에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보행자 통행 방해’ 혐의로 소환된다든지, 남편과 헤어진 뒤 먹고살 수 없어 복지급여를 신청한 이후 지속적 가택수색을 당하고 잠재적 사기꾼으로 취급받는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미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가난 탓에 벌금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을 잡아들여 교도소에 가두기 시작하면서 지난 20년 동안 거의 두 배로 늘어나 수감 인구가 인류 역사상 최대 수치인 6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이상한 현상은 같은 기간 동안 살인, 폭행, 강간, 강도 등 강력 범죄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44퍼센트 넘게 감소했다. 특히 미국 (불법)이민자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2000년대 들어 빈곤률은 꾸준히 늘어나서 2010년에는 15.3퍼센트에 달했는데도 말이다. 가난과 중범죄 사이의 통계적 관련성은 낮아졌는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법 공격은 꾸준히 증가했으므로, 이는 결국 법 집행에 어떤 중대한 편견이 깃들어 있음을 공공연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부자들과 강자들에 대한 사법적 처벌은 오바마 행정부 내내 서서히 약화되면서 (유죄)협상을 통한 ‘돈 받아내기’로 대체되었다. 가령,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일으켜 전 세계 부의 40퍼센트를 증발시킨 월스트리트 금융회사 고위간부 중 “직접 벌을 분배받은” 이들은 지금껏 하나도 없다. 천문학적 금액의 과징금을 그 회사가 대신 지불했을 뿐이다. 그마저 국가 재정을 동원해 투입한 지원금에서 그 돈이 나왔다. 고작 복지급여 수백 달러를 부정 수급한 이들을 찾겠다고 해마다 2만 6000가구를 수색해서 교도소로 보낸 사법당국이 미국 정부에 260억 달러나 손해를 끼친 금융사기꾼을 수감이 필요한 중범죄자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 사법체계에 “부수적 결과”라는 낯선 개념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개념은 현재 미국 법무부 장관인 에릭 홀더가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작성한 문서에 나오는 표현이다. “A기업을 기소하고, 이 일로 인해서 경제가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기소 여부를 경제적 영향(돈)과 결부하겠다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들어온 대로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공공연하게 합법화하며, 저자는 이를 “디스토피아의 도래”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디스토피아에서는 국가의 무도한 광기는 비밀주의나 검열주의가 아니라 불공정함이다. 우리 사회는 성공과 부만을 중시하고 실패와 가난을 멸시하면서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시키고, 그 양분 작업을 가속하는 일에 법원 등의 기구들을 동원하고 있다. 승자는 부를 움켜쥐고 법망을 빠져나간다. 패자는 가난뱅이가 되고 감옥에 갇힌다.”
물론 저항도 꾸준하다. 월스트리트 불기소 조치, 즉 “홀더 주식회사의 사업”에 대한 미국 국민의 공분이 온도를 높여가는 가운데, “부수적 결과”에 반대해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움직임 역시 제도적 압박 속에서도 만만치 않게 일어나는 중이다. 저자의 말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사법제도는 존재 가치가 있다.” 흔들리는 사법 정의를 충격적으로 고발한 이 책을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의 한국을 성찰하는 것은 이런 뜻에서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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