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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공동체를 꿈꾸다

불혹에 만나 칠순 훌쩍… 책 덕분에 평생 벗으로 살죠 _홍동 할머니독서모임


30년간 함께 책을 읽어온 홍동 할머니 독서모임 회원들이 모임을 마치고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그동안 독서모임을 거른 적은 두어 차례에 불과하다. 홍곡마을 민택기사진관 제공



모임에는 아직도 이름이 없다. 당신들은 이름에 별 뜻을 두지 않아 붙이지 않았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 모여서 책을 읽으니까 한때 ‘목요모임’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할머니 독서모임’이라고 부른다. ‘홍 사모님’ 이승진 할머니가 말문을 연다.

“마흔 살 무렵이었어요. 풀무학교 여선생님들을 중심으로 같이 모여서 책을 읽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곧바로 독서모임이 시작되고, 거기에 슬쩍 끼어들었어요.”

이승진 할머니는 학교와 마을을 잇는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평생 그 일에 헌신해 온 풀무학교 홍순명 전 교장의 부인이다. 

마을길 옆에는 군데군데 개망초꽃이 한창이다. 흰 꽃잎과 노란 수술이 어울린 것이 수줍어 아름답다. 벼가 뿌리를 내려 선명한 녹색이 올라온 논에는 드문드문 청둥오리들이 헤엄치며 풀을 잡는다. 멀리 왜가리도 몇 마리 내려앉아 기다란 목을 물속에 넣고 물고기를 찾는다.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진 마음이 절로 시원해진다. 한길에서 소로를 타고 조금 들어가자 여름 꽃이 만발한 아기자기한 정원이다. 정원 옆 낮게 이층으로 지은 목조집이 모임 장소다.



풀무학교에서 생겨 할머니 모임으로

첫 모임은 1985년 어느 목요일에 있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무려 30년 동안 두어 번 정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쉬었을 뿐이다. 한때 스무 명에 이르렀던 회원이 지금은 다섯으로 고정되었다. 가끔씩 마을에 새로 온 젊은(?) 처자들 한둘이 소문을 듣고 드나드는 정도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처럼 마르지 않는 이 한결같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힘을 얻는 것일까? 홍 사모님이 살짝 웃으면서 말한다.

“사실 쭉정이들만 남은 거예요. 똑똑한 이들은 바빠서 모두 제 일들 하러 가버렸습니다. 저희들은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 공부할 겸 매주 나와서 책을 읽은 거예요. 머리가 좋아서 정리해서 발표하지는 못하고 감명 깊었던 부분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게 그저 좋았습니다.”

솜씨 좋게 우려낸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켜고 둘러보니 모두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책을 읽어서 겸손한 것인지, 겸손해서 책을 읽은 것인지 그 선후를 알 수 없다. 할머니 독서모임이 있는 충남 홍성의 홍동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에 대안교육의 상징인 풀무학교가 있고, 학생들이 농사 지은 밀로 직접 빵을 만들어 파는 마을 빵집이 있고, 지역 주민들이 주인이자 손님인 마을 맥줏집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건물을 짓고 책을 모아서 운영하는 도서관이 있을 뿐이다. 국내 유기농업의 발원지이자 협동조합 운동의 주요 파종지인 덕분인지 마을 곳곳에 상호 협력을 밑거름으로 하는 생태적 협동조합 경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승진 할머니가 말을 잇는다.

“무교회(無敎會) 집회를 평생 나갔는데 신앙적으로 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책을 읽으면 나아질까 싶어서 모임에 끼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는데, 생각의 힘을 길러 성서를 내 눈으로 깊이 읽어 깨닫고 싶었습니다. 김교신, 노평구, 국희종, 박석현, 유희세 등 무교회 선배들 책을 주로 읽었습니다.”


“책 읽고 다툴 필요 있나”

서른 해가 훌쩍 지났다. 불혹의 나이에 모인 후 어느덧 칠순을 모두 넘겼다. 풀무학교 학생 출신인 이재자 할머니가 오래전 귀향하면서 넷이 주로 모였고, 2009년경 마을 약국의 노의영 할머니가 합류했을 뿐 계속 그 얼굴들이다. ‘이문회우(以文會友)’, 책으로 벗들을 만나고 그 벗들과 함께 평생을 보냈다고 자부할 만하다. 모두들 감회가 있는지 대화가 느리게 흘러간다. 이재자 할머니가 말한다.

“삶 속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이분들 책을 읽으면 꼭 부흥회라도 치르고 온 기분이 듭니다. 읽고 밑줄 긋고 책모임에 나와서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맺힌 것이 스르르 풀어져 버려요.”

책은 천천히, 조금씩 아껴서 읽는다. 한 번에 30쪽에서 50쪽 정도 약속한 분량만큼 읽고, 각자 마음에 닿았던 구절을 읽으면서 느낌을 덧붙인다. 독서 내용을 파악하고 논제를 정해서 서로 생각을 불붙게 하는 토론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읍내에서 매주 버스를 타고 모임에 오는 이승자 할머니가 말한다. 홍 사모님의 동생으로 언니 따라 모임에 왔다가 책의 세계에 푹 빠졌다.

“책 읽고 굳이 다툴 필요는 없지요. 때로 서로 못마땅하더라도 좋은 글을 읽으면서 삭이는 겁니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서로 다른 곳에 밑줄 친 것을 보면서 그 사람 생각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가지 재미가 있다면 책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여기, 저 사람은 저기 하고 상상하는데, 지금은 거의 들어맞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다섯 얼굴에 모두 미소가 걸린다. 아무렴 하는 느낌이다. 하기야 그 긴 세월 동안 모임을 같이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요즘에는 토론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모임이 활발한 편이다. 비용을 치르고 독서 지도자를 따로 두어, 내용을 요약하고 논제를 뽑은 후 의견을 나누어서 토론을 붙인다. 이런 것은 책모임이 아니라 차라리 독서 비즈니스라고 불러야 하리라. 단지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좋았던 느낌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미 넘치도록 충분하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해온 주정자 할머니가 이야기한다.

“남의 말 안 하는 모임이라서 참 좋아요. 할머니들이 책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라야 거기에서 거기지만, 같이 책을 읽고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보니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졌어요. 다소 기분 나쁜 이야기라도 일단 들어보자는 심정이 되어 자제력도 높아졌고요. 어쨌든 홍동 언니들처럼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우치무라 간조 전집을 읽는 이승진 할머니의 손. 홍동 할머니 독서모임은 10권짜리 이 전집을 완독했다. 홍곡마을 민택기사진관 제공



6,000쪽 전집 4년에 걸쳐 읽기도

시골 생활은 바쁘다. 새벽부터 작물을 돌보는 일들이 하루 종일 몰아닥친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고되다. 건장한 젊은이들조차도 책을 읽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도대체 언제 짬을 내는 것일까? 노의영 할머니가 말한다.

“목요일 오후에 모임이 있으니까 수요일 저녁이나 목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읽습니다. 함께 읽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의무를 다해야죠. 읽으면 힘이 나는 구절도 많고요. 바빠서 다 읽지 못했을 때에도 일단 나옵니다. 저는 다른 사람 발표 듣는 것도 행복해요. 그래도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천국입니다. 그때는 하루에 한 권도 읽을 수 있습니다.”

각자 바쁜 일을 치르더라도 두 명 이상만 되면 모임은 반드시 열린다. 고요히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모여서 두런두런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힘들 때도 서로를 의지하면서 세월을 함께 보냈다. 바깥의 열기와는 사뭇 다른, 따스한 공기가 흘러넘친다. 이승진 할머니가 말한다.

“무교회 선생들 책을 읽다 보니 내촌(內村) 선생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거예요. 구절구절이 좋았어요. 그래서 ‘내촌감삼 전집’을 모두 읽기로 했습니다. 4년에 걸쳐 읽고 나니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세를 타고 ‘김교신 전집’도 같이 읽었습니다.”

내촌은 일본의 무교회주의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말한다. 김교신, 함석헌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일제강점기 월간지 ‘성서조선’을 통해 류달영, 노평구, 송두용, 장기려 등으로, 오산학교를 통해서 이찬갑을 거쳐 풀무학교로까지 이어지는 현대 한국의 민족적, 생태적, 협동적 사상의 중요한 뿌리에 해당한다. 이 사상의 또 다른 뿌리인 다석 류영모와 함께 중요한 탐구의 대상이다. 문제는 방대한 양이다. 국내에 현재 10권짜리 전집이 나와 있는데, 깨알 같은 글씨의 세로 2단 조판으로 권당 평균 600쪽에 이른다. 이에 비하면 ‘김교신 전집’은 얇다. 권당 평균 500쪽짜리 7권에 불과하다. 느리게 천천히 할머니들은 이 책들을 모두 읽었다. 이재자 할머니가 말한다.

“내촌 선생님 책은 새벽을 울리는 종소리 같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맑아지는 좋은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어느 날 내촌 선생이 딸을 잃고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같이 읽은 적이 있는데, 모두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쉬면서 ‘태백산맥’ ‘토지’ 독파 

할머니들이 무교회 책만 읽은 건 아니다. 신앙을 제대로 하려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지인의 권유로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박경리의 ‘토지’는 ‘잠깐 쉴 때’ 읽었다. 읽고 나서는 현장에 다녀오고 싶어져서 작년에는 처음으로 마을 청년 차를 얻어 타고 하동 평사리의 ‘토지문학관’까지 나들이를 했다. 이승진 할머니가 말한다.

“‘토지’는 참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박원순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임꺽정’은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피 냄새가 너무 나고, 말이 험악해서 별로 읽고 싶지 않더라고요. 끔찍했습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좋은 말이 있는 것만 읽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내촌감삼 전집’을 다시 읽기로 했습니다.”

열어둔 창으로 스르르 바람이 밀려든다. 이야기꽃이 피었다가 지면서 마침내 찬란한 빛을 뿌린다. 그렇다. 어떤 책을 읽느냐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다. 할머니 독서모임의 결론은 ‘좋은 말이 있는 책’이다. 아, 큰 지혜는 오히려 평범해 보인다. 나오다 보니 같이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 인터뷰로 미루었던 부분을 마저 읽는 것이다. 언뜻, 멀리서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