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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미생, 재생, 신생, 공생 ― 2014년의 독서 트렌드 읽기


KBS의 ‘TV 책을 보다’ 프로그램 자문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제 저녁 첫 모임이 있었는데, 부탁을 받아서 발제 형식으로 2014년의 출판을 미생, 재생, 신생, 공생의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 옮겨 둔다.



미생, 재생, 신생, 공생

― 2014년의 독서 트렌드 읽기


도서정가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2014년 출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모든 서적의 할인율을 정가 대비 15% 이내로 제한한 법이 통과되고, 지난 11월 21일부터 전면 시행됨에 따라 올해 내내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최대 90%에 이르는 출혈적 할인으로 재고를 떨어내려 했으며, 독자는 독자대로 정가제 시행 이전에 싼값에 필요한 책을 사 두려 했다. 그에 따라 출판계 전체는 말 그대로 대혼란 상태에서 한 해를 억지로 버텨 온 셈이다. 지난주에 도서정가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시장 혼란은 서서히 잦아들겠지만 재정가도서를 둘러싼 논란, 시장의 단기적 축소 등 그 여파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에 따른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책과 인간의 만남을 어떻게 재조직하고 장려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14년 독자들이 특별히 사랑했던 책을 중심으로 올 한 해 책의 세계에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몇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미생(未生)’이다. 

요즈음 하루에 2000질씩 판매된다는 『미생』(윤태호) 열풍은 이른바 ‘미디어셀러’(영화, 드라마,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의 위력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도 물론 영화가 개봉되면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는 동안 『혁명』(김탁환)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미생』은 미디어셀러이면서 동시에 자기계발 판타지(성공 신화)의 종말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완생(完生)이 아니라 미생으로 살아간다. 미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삶의 비루한 조건 속에서도 어쩔 수 없는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수(정수, 묘수, 꼼수 등)를 주고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꿈이 현실을 압도할 때 거대한 기만이 사회 속에서 거품처럼 생겨나는데, 『미생』은 공감 있는 스토리를 통해서 ‘억압된 현실’을 ‘귀환’시킴으로써 대중들에게 삶의 불가피성(긍정성)을 환기한다. 

올해 가장 주목할 소설 중 하나인 황정은 소설의 제목처럼 ‘계속해 보겠습니다’인 것이다. 무엇을 계속해 보겠다는 것일까? 당연히 인생이다. 세월호든, 불황이든, 구조조정이든, 차별과 멸시든 간에 삶의 처참함이 남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트라우마에도 우리는 죽지 말고 ‘미생’의 생물로, 그러니까 장그레이자 오 과장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재난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온갖 도전을 견뎌 가면서 치열하게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삶의 부정에 대한 긍정의 복귀이고, ‘판타지’에 대한 ‘리얼’의 승리이다.(성석제의 『투명인간』이나 천명관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소중한 성공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룰 수 있다.) 



둘째, ‘재생(再生)’이다. 

휴식 없는 노동, 생체 에너지의 충전 없는 연소에 따른 ‘번 아웃(Burn-out)’은 현대 사회의 본질이다.(한병철, 『피로사회』) “다 타 버렸어!”라는 소진 증후군은 자기 일에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불시에, 그러나 지속적으로 습격한다. 일으로부터 보람과 의미를 찾기 힘든 세상에서 ‘소진된 인간’(들뢰즈)은 힘을 충전하고 자신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작년 말에 출간되었지만 올해 내내 베스트셀러였던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스피노자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감정의 주인이 되라’라는 메시지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을 되돌려 받기 위한 대담한 모험에 나설 것을 촉구함으로써 돈에 얽매인 직장인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여름에는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정여울)이 ‘재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행은 인생을 리셋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비교적 손쉬운 수단이지만, 이 책은 묵직한 교양과 세련된 감각을 겸비한 저자 특유의 날렵함과 제휴사인 대한항공의 공격적 마케팅에 힘입어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기업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은 ‘대한민국 광고 대상’을 받는 등 콘텐츠 마케팅의 주요 성공 사례로도 기록해 둘 만하다. 

가을에는 『비밀의 정원』이 안티 스트레스 컬러링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 트렌드를 이어갔다. 색칠이라는 손노동을 하고 그 결과물을 소셜미디어로 공개해 ‘좋아요’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이 책의 폭발적 성공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는 열망이 적절한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활화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은 주로 어린이책에 머물러 있던, 읽기와 행위를 결합한 ‘액티비티 북(Activity Book)’이 내용에 따라서는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서 손글씨, 종이접기, 퍼즐 등 새로운 액티비티 북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할 듯도 하다.



셋째, ‘신생(新生)’이다. 

자본의 세계화, 인구의 고령화, 경제의 디지털화에 따라 고용은 증발하고 사회안전망은 부족한 상황에서 세계의 앞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대격차’)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모색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불꽃처럼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세습 자본주의의 실체를 경제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불평등과 분배에 대한 관심을 전 세계적으로 촉발했으며, 국내 독자의 반응 역시 대단히 뜨거웠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목에 평생을 바친 프란체스코 교황 관련 서적들의 열풍도 ‘신생’을 열망하는 대중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덴마크를 한국의 벤치마킹 사례로 제시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연호)와 육아 문제에 대해서 프랑스로부터 배우려는 『프랑스 엄마처럼』(오드리 아쿤)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는 시민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거시적인 지표를 제시하는 데 실패해 버렸다. 지난 반백년 동안 뜨겁게 타올랐던 성공 신화는 그 불빛이 꺼졌으며, 이제 새로운 삶의 윤리가 출현하기를 독서 대중들은 바라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장하성),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등 경제학 서적, 『나의 한국 현대사』(유시민) 같은 역사 관련 서적이 많이 읽힌 것도 (저자 브랜드 파워도 있지만) 우리 삶의 규칙들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하는 대중의 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공생(共生)’이다. 

소셜 네트워크 사회는 모든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미디어로서 살아가는, 즉 미디어 실천이 일상화, 보편화된 사회이다. 사람들은 자신 또는 세계에 대하여 쓰고 찍고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다중 다매체 공유사회의 도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지식 사회의 중요한 주제가 되면서 『유리 감옥』(니콜라스 카), 『제2의 기계 시대』(에릭 브린욜프슨), 『한계비용 제로사회』(제러미 리프킨) 등이 화제로 올랐다. 

한편, 창조를 독점하는 카피라이트(Copyright)의 시대에서 창조를 공유 가치(Sharable Value)의 시대라는 낯선 사회경제적 질서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거시적 차원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초연결 사회에서 자신을 어떻게 세련되게 표현하여 브랜딩할 것인가에 대한 미시적 차원의 관심은 더 뜨거웠다. 글쓰기, 프레젠테이션, 온오프 미팅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표현 욕구의 분출은 필연적이다. 『말공부』(조윤제), 『고종석의 문장』, 『대통령의 글쓰기』(강원국) 등은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서 이러한 거대한 흐름에 잘 올라탐으로써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책은 삶과 이어져 있다. 책은 삶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태어나서 읽히고 확산된다. 우리는 삶을 더 잘 들여다보려고 책을 읽지만, 책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우리 삶의 깊은 무의식을 마주쳐 버린다. 그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있기에 아직 트렌드가 되지 못한, 그러나 마땅히 ‘올해의 소설’이라고 불러 마땅한 『소년이 온다』(한강)를 마지막으로 환기해 두고 싶다. 5․18 광주를 다룬 이 작품은 과거의 상처를 끌어않지 않고는 미래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상처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애도의 참된 형식은 무조건적인 우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문학은 삶에서 나오지만, 기억의 형식으로 쓰이지만 늘 삶 너머, 기억 바깥을 가리켜 보여 준다. ‘삶을 넘어서는 삶’, 즉 ‘비생(非生)’의 존재를 끄집어내는 것, 어쩌면 책(문학)의 진짜 존재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생의 형식을 미리 기억하기 위해 책을 읽고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