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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절각획선(切角劃線) - 2014년 1월 26일(일)

 

일주일 내내 읽기만 하고 기록할 수는 없었다. 잡다한 일들에 온통 마음이 쏠린 데다 어느 순간 고전의 번역에 시간을 여분의 시간 대부분을 빼앗겼던 탓이다. 그사이 많은 글이 곁을 스쳐 지나갔고, 또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3), 리쩌허우의 『중국 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13), 앤 스콧의 『오래된 빛』(강경이 옮김, 알마, 2013)에 이어서 손에 든 책들은 정민의 『우리 한시 삼백수』(김영사, 2014),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 그리고 기획회의360호이다.

정민의 번역은 기지 넘치고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매일 일어나 두세 편씩 읽으면서 외니 따로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민이 산새라는 제목으로 옮긴 김약수(金若水)의 「임실 공관 벽에 쓰다(題任實公館)」은 이번에 처음 읽은 시인데, 인사의 참혹함과 자연의 무심함이 뼛속 깊이 야속한 놀라운 작품이었다.

『돈키호테』는 지난해 스페인 여행 후 다시 읽고 싶어져서 민용태 선생이 옮긴 『돈 끼호떼』(창비, 2012)로 읽다가 창비식 맞춤법 때문에 몰입이 계속 끊어지는 바람에 짜증이 일어 중도에 포기했는데, 이번에 다시 박철 선생의 번역본을 싸게 팔기에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오늘까지 4분의 1 정도 읽었다. 어쨌든 텍스트의 세부마다 세르반테스의 눙치는 솜씨가 계속해서 빛을 발하는데, 한참을 웃다가 문득 정신 차려 보면 그 깊이에 감탄을 터뜨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기이한 경험이 연속되는 중이다.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의 열풍 이후, 이 철학자의 다른 책을 읽고 싶어 고대하다 작년에 나오자마자 확보했던 책인데,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다 전혀 읽지 못했다. 그런데 책장을 정리하다가 툭 흘러내리는 것을 손에 쥐고 앞부분을 훑어 내리면서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노동이 중심이 되었던 『피로사회』와 큰 맥락을 같이하면서 이 책은 현대인의 삶의 문제를 시간을 중심으로 꿰뚫어 기술하고 있다. 삶에 중력을 부과하던 시간이 사라지자마자 현대인의 삶에 불어 닥친 권태와 과잉 활동과 무의미의 지옥을 이처럼 생생하게 철학적으로 논파한 책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기획회의360호의 특집은 저출산 고령화인데, 이미 우리의 미래 앞에 입을 벌린 채 서 있는 검고 어둡고 끔찍한 심연을 심각하게 보여 준다. 강양구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고령화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재전유하는데, 다른 글들보다 그 문제의식의 예리함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글이 짧은 탓인지 본격적 탐구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1)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박철 옮김, 시공사, 2004) 중에서


그대가 돈이 많을 때에는 많은 친구를 헤아릴 수 있으나, / 시절이 암담해지면 그대는 홀로 남으리라. (카토) 14

자네의 이야기를 읽고 우울한 사람도 경멸하지 않게 꾸미고, 현명한 사람도 칭찬을 금하지 않게 꾸미게. 한마디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싫어하지만,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좋아하는 그 허무맹랑한 기사담을 전도하는 데 자네의 목표를 굳게 정하란 말일세. 그 일만 성공한다면, 그건 결코 하찮은 일에 성공한 것이 아닐 테니 말이야. (16) 친구의 입을 빌려, 앞으로 할 이야기의 야망을 과감하게 폭로하는 대담한 진술! 사실, 이는 모든 위대한 작품의 존재 방식이다. 고전들은 쓰레기가 되어 버렸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낡은 이야기를 전도함으로써 비로소 빛을 발한다. 어쩌면 이는 창조의 참 모습이다.

남의 인생에 대해 / 논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말라. / 자신과 무관한 일에 / 참견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니. (20) 이런 말은 인생에 대해서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공공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공공 영역에서는 침묵이 흔히 재앙을 불러일으키곤 하니까.

그대가 상대가 아니라면, 그대에게 필적할 만한 삶은 없노라. / 수많은 적수들 가운데 그대 자신만이 적수가 될 수 있으니. / 그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대에게 대적할 자가 없으니, / 승리를 거두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네. (26) 이처럼 자신의 빛으로만 살아가는 인간은 더없이 행복하다. 그는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테니, 다른 모든 영웅들처럼 그 이름 역시 저 하늘의 별처럼 영원하리라.

잠도 안 자고 책만 읽다 보니 머릿속이 푸석푸석해지는가 싶더니 결국은 이성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머릿속이 책에서 읽은 마법 같은 이야기들, 즉 고통과 전투, 도전, 상처, 사랑의 밀어들과 연애, 가능치도 않은 갖가지 일들로 가득 차 버린 것이었다. 그는 책에서 읽은 몽환적인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40)

모든 준비를 갖추고 나자, 씻어 버려야 할 불명예, 바로잡아야 할 부정, 고쳐야 할 무분별한 일, 개선해야 할 폐단과 해결해야 할 부채가 있는 이상 하루라도 지체하는 건 세상에 대한 손실이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으므로, 자신의 의지를 실천에 옮기는 데 더 이상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45)

우리의 모험가 돈키호테에게는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자 책에서 읽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주막을 보자마자 성이라고 생각했다. (47) 이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다. 상상력이란 없다. 천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현실로 여기기에 천재인 것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세상 모든 것을 현실로 변형한다. 비루한 현실(주막)은 그를 통해 찬란한 모험의 장소()로 변신한다.

내가 너희에게 그녀를 보여 준다면 그렇게 분명한 사실을 고백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중요한 것은 그녀를 보지 않고도 믿고, 고백하고, 확신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녕 너희가 맹세하지 않는다면 나와 결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70)

더구나 시인이 되면 어떻게 해요? 그 병은 한 번 걸리면 고칠 수도 없다는데. (87)

하느님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분이니, 오늘 불행을 겪은 자라도 내일은 행운을 얻을 것이네. (92)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도 없어지리라. (93) 이 진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결과는 이미 나와 있으므로, 원인을 제거해도 전혀 없어지지 않는다. 잘해야 그저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원인이 될 뿐이다.

있지도 않은, 밀가루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든 빵을 찾는답시고 세상 방방곡곡 쫓아다니지 말고 집에 계세요. (94) 우리의 모험은 대개 이렇게 소박한 말에 의해 좌절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더 빨리 좋은 것으로 가득 차지 않는 법이다.

입 다물어라, 산초. 전쟁터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게 마련이다. (102)

아까도 말했지만, 산초, 너는 도무지 모험을 알지 못한다. (105)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117~118)

만약 당신이 나를 지켜보았다면/ 일요일에 차려입었던 옷을/ 월요일에도 입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오./ 사랑과 멋스러움은 같은 길로 간다고 하듯/ 난 항상 그대의 눈에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오. (135)

평온한 일상, 안락한 삶, 휴식은 비겁한 귀족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 모험, 불안정한 생활, 결투 등은 이 편력 기사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148) 이는 어쩌면 근대에 대한 장엄한 예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편력 기사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명예도 없다. 명예 없는 편력, 그것이 오늘날 우리 불쌍한 현대인들의 삶이다.

전쟁이나 전쟁과 관련한 일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땀 흘리고 애쓰고 노력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150)

사랑하는 이에게서 멀어진 연인에게는 무엇 하나 괴롭지 않은 게 없고, 두렵지 않은 게 없다. (167)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질투심을 일으킬 수 없다.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