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저항

(3)
편집자의 매카시즘 리처드 에번스의 『에릭 홉스봄 평전』(책과함께, 2022)에서 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극단의 시대』의 프랑스어판 출간을 둘러싼 이상한 논란이었다. 알다시피, 20세기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영국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비판적 논쟁과 함께 열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갈리마르, 알뱅 미셸, 파야르 등 프랑스 주요 출판사들이 제작비, 번역비 등을 이유로 이 책의 출판을 거부한 것이다. 전작인 『혁명의 시대』가 기대보다 안 팔린 이유는 분명히 있었으나 핑계였다.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극단의 시대』가 소비에트 중심으로 기울어져 미국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서구 민주주의를 폄훼하는 등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극단의 시대』가 유대인 학살과..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 -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 일반적으로 책은 특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 책을 이루는 문장이 만드는 호흡은 읽기의 속도나 밑줄이나 메모의 유무 등을, 심지어 장소까지도 결정한다. 주말에 시골마을에서 읽으려고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6)을 챙겨 갔다. 올해 여섯 번째 책으로, 청탁과 관계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자유롭게 읽기 시작했다. 앞머리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넘친다.“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낯선 사람과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공포와 굴복의 기록일 뿐 아니라 위험에 도전한 기록이다. 특히 호기심에 이끌려 저항한 기록이다. 호기심은 빛을 어둠으로 바꾸는 온갖 종류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길이고, 문제를 미세한 분자로 분해해서..
밑줄과 반응 2012년 5월 31일(목) 고대 중국에서 민(民)이란 글자는 한쪽 눈을 찔러서 상해를 입힌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지배층 인(人)과 피지배층 민(民)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인’이 사람이었다면 ‘민’은 사람도 아니었다. ― 『저항자들의 책』 누군가의 서평을 읽다가 인용문을 밑줄쳐 두었다. 여기까지 적어 두고 다른 일을 하다가 잊어버리는 바람에 출처를 상실했다. 아마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서평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보통선거와 의무교육이 실시된 이후, 그래서 모두가 한 표만큼의 정체성을 갖게 된 이후, 우리는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곤 한다. 역사는 민(民)이 인(人)으로 바뀌는 기나긴 진보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