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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雜文)/걷는 생각

오에 겐자부로와 재현의 윤리

<오에 겐자부로와 재현의 윤리>

[여]동생은 자신과, 또 다른 두 사람[아내와 딸]이 내 소설에서 일방적으로 묘사되어 온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세 여자’라는 그룹을 만들어 각자 오빠의 소설에 대한 반론격 글을 써서 돌려보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저 쓰기만 하고 확실한 독자가 두 명 있다는 걸로 만족해 왔지만, 오빠가 ‘마지막 소설’이라느니 하는 말을 다시 하고 있기도 하니, 오빠가 정말로 그 소설을 쓸 거라면 다 쓰기 전에 우리가 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오빠에게 보내자, 라고 이야기가 되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한번 어떤 착상을 하면 곧장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게 동생 성격이어서 초고를 넣은 서류 봉투는 이미 나한테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어느 정도 읽어보긴 했지만, 동생과 동생의 동지들이 초고를 완성한다 해도 요즘 출판계 사정상 책으로 발간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범포 노트에,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서류 봉투 속에 있는 글의 일정 분량을 골라서 덧붙이면 어떨까? 양쪽 다 나라는 사람이 주제인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내 글은 『만년양식집』으로 놔두고, 덧붙일 세 사람의 글은 ‘세 여자가 쓴 또 다른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여 함께 철한 원고를 몇 부 복사해 우선 그녀들에게 보내두면, 출판된다면 물론이고 출판되지 않는다 해도 이 복사본은 남으니 동생 기분은 풀리리라.

그것이 내가 만드는 사가판(私家版) 잡지 『만년 양식집+알파』다. 

― 오에 겐자부로, 『만년 양식집』, 박유하 옮김(문학동네, 2023) 중에서

오에 겐자부로, 『만년 양식집』, 박유하 옮김(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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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김봉곤, 김세희 작가와 관련된 이른바 사생활 표절 문제가 있었다. 그와 관련한 여러 문학 잡지의 이론적 논의도 있었고, 몇몇 작가의 작품을 통한 응답들도 있었다. 두 달 전엔 정지돈 작가와 관련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사유는 크게 의미 있지 않았다. 작가와 출판사의 빠른 절판으로, 처리 방식만 빨라졌을 뿐이다. 말이 충분히 나오기 전에, 언어를 고갈시킬 것!!

『만년 양식집』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언어를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사생활 표절 또는 무단 인용 같은 게 있을 수 있다는 발상은 솔직히 당혹스럽다. 우리 각각의 삶과 그 삶이 내 안에 기록한 이야기는 나의 것이지만, 나의 삶이 타자와 직접 겹치면서 또는 간접적으로 전해지면서 타자 안에 남기는 흔적들은 전혀 내 것이 아니다.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것이다. 자기 이야기 안에 타자의 이야기를 내장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이야기도 불가능하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공동체를 이루어 같이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항상 타자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글에 등장해 받들어질 또는 능욕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늘 조심하고, 사회 통념에 맞추어, 도덕적이고 훌륭한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그 불가피함을 피할 수 없다는 것, 타자가 읽고 경험하고 사유하고 느낀 것은 굳이 따진다면 그의 삶에 내접한 것이므로, 그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때 그 안에 삽입된 내 이야기에 대해 미리 인용 허락을 받으라고 딴지 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삶은 저작권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내 삶이 타인의 서사 속에서 표현되었을 때, 그 부당함, 그 부정적 효과에 대해, 그것이 자기 삶에 가져온 고통에 대해 말이나 글로, 또는 명예훼손 같은 법적으로 대응/대항할 수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서 일방적으로 묘사되었던 세 여자가 이에 항의하는 글을 보내왔듯이 말이다. 이는 전적으로 등가적 행위다. 재현의 윤리가 사생활 표절 등 자극적 표현을 통해 타자의 삶에 대해 말하는 행위의 원초적 불가능성 또는 부도덕성 문제로 흘러가는 건 온당치 못하게 느껴진다. 표현의 자유를 억누를 가망성이 있으니까.

이 당연함을 전제로 놓은 후에야 문학에서 재현의 윤리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타자의 삶을 어떻게 가져와야 하는가. 그 재현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는 숱한 논점과 이야기가 이미 있었다. 여러 논의를 살피면, 이와 관련해 절대 의무나 정해진 정답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거기에 예술적 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수적 피해’란 본래 미국 정부가 군사 활동에서 불가피하게 따르는 민간인 피해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말로 썼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말에 깃든, 즉 ‘부수적’이라는 말 속에 도사린 ‘고의는 아니다’라는 표현이 미국 정부의 무책임함을 은폐하고 희석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피해자들 대다수가 사회적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폭염의 정치경제가 약자들을 살해하듯, 가자를 침략한 이스라엘 군대의 잔인한 학살이 잘 보여준 것처럼 전쟁의 정치경제에서 부수적 피해를 당하는 건 주로 어린이, 노인, 여성, 장애인 등이듯 말이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부수적 피해가 일어날 수 있기에 재현의 윤리가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타자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려 말하기. 본문에서 보듯, 심지어 오에 같은 작가조차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세 여자의 항의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애초에 오에의 작품이 아버지, 글을 써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이 위대한 가부장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정된, 기울어진 운동장인 까닭이다.

이 말년의 작품에서 오에는 뒤늦게 이 사실을 날카롭게 받아들여, 자기 소설에 그동안 등장했던 세 여자를 비롯한 여러 타자들(아들, 친구 등)을 불러들인 후 그들의 목소리를 자기 이야기에 맞서도록 배치한다. 이른바 다성적 카니발을 시도한다. 동생과 동생의 동지들이 초고를 완성한다 해도 요즘 출판계 사정상 책으로 발간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해서다.(아마 최근 이런 출판이 활발하고, 또 적잖은 독자도 있는 국내에서라면 출판되었을 가망성이 높은 느낌이지만) 어쨌든 그 나름대로, 부수적 피해에 대한 속죄의 언어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세우려 한 것이다.

나는 이게 문학적으로 더 옳다고 생각한다. 기존 작품을 고쳐 쓰고 다시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다른 목소리가 대등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도록 책으로 출판하는 일, 적어도 그 항의의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에 맞설 수 있도록 자기 작품 안에 내삽하는 일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이 논의에서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문제는 분명히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야기에는 반드시 타자의 삶에서 나온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때 우리는 절판이라는 형태보다 더 나은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삼가 묻고 또 질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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