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문(雜文)/걷는 생각

루이스 세풀베다, 지구를 사랑한 소설가

칠레의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각주:1]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다. 평생 독재와 맞서 싸운 자유의 수호자였고,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에 맞선 생태주의자였다. 또 “나의 조국은 스페인어”라면서 오로지 문학의 시민이기만을 원한 코스모폴리탄이기도 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연애소설 읽는 노인』(정창 옮김, 열린책들, 2001).루이스 세풀베다의『연애소설 읽는 노인』(정창 옮김, 열린책들, 2001).


한 작가의 죽음에 대한 최고의 애도는 책장에 꽂아둔 책들을 꺼내서 먼지를 털어낸 후 천천히 읽어 나가는 것이다. 인물과 배경을 상상하고, 대화와 묘사를 음미한다. 단어에는 동그라미를 치고, 구절에는 밑줄을 긋는다. 있는 책은 새로 읽어 메모를 더하고, 없는 책은 마련해 마저 읽어 생각의 재료로 삼는다. 한 차례 작품을 모두 읽어 기억의 주름을 깊게 파고 나면, 홀로 천도제라도 지낸 느낌이 든다. 비로소 작가를 떠나보낼 마음이 서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한 유대인 수용소 한구석에 놓여 있는 돌멩이에 새겨진 글귀이다. 세풀베다의 소설 『소외』[각주:2]에 나온다. 닥쳐온 죽음에 좌절한 마음이 스스로를 증언 중이다. 그러나 이 소외된 언어는 한 줄로 남겨진 희망이기도 하다. 희생자들의 흔적이 있는 한 누군가 반드시 이어받기 때문이다. 

세풀베다는 문학의 임무가 이러한 ‘내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인간의 탐욕 탓에 짓밟히고 망각당한 존재들의 입술이 기꺼이 되고자 했다. 세풀베다는 말한다. “나의 모든 소설들은 소외된 자들을 얘기한다. (중략) 소외에는 분명히 여러 가치가 담겨 있다. 연대감과 의리는 소외된 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존도 보장할 수 없다.”(『알라디노의 램프』)[각주:3]

루이스 세풀베다의『알라디노의 램프』, 권미선 옮김(열린책들, 2010).루이스 세풀베다의『알라디노의 램프』, 권미선 옮김(열린책들, 2010).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아마존 숲의 개발 과정에서 새끼를 잃어버린 살쾡이의 복수극을 다룬다. 『지구 끝의 사람들』[각주:4]은 남극해 부근에서 불법 고래잡이를 하는 일본 포경선 니신마루 호에 맞서는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악어」[각주:5]는 악어가죽을 얻고자 밀림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한 부족을 말살한 가죽 회사 사장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추적한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각주:6]는 오염된 바닷물 탓에 죽어가는 갈매기가 고양이한테 새끼를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자본은 흔히 맹목이다. 개발과 착취를 동의어로 쓰는 버릇이 있다. 눈앞의 이익을 추구할 뿐 생태계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에서 온 사람’인 아나레족이 보기에, 악어를 밀렵하는 이들은 ‘물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밀렵자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존재들을 공격하고, 그 대가를 자신의 죽음으로 치른다. 이것이 세풀베다가 개척한 ‘생태주의 스릴러’의 중심 서사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이 스릴러의 한 에피소드라는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그러나 자본의 탐욕이 일으킨 재앙은 우리를 패배시키지 못한다. 세풀베다는 말한다. “형제여, 우리는 앞으로 열 번은 더 이겨낼 것이다.”(『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각주:7] 삶이란 본래 “의심, 좌절, 재난으로 가득 찬 길”(『외면』)[각주:8]이지만 동시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파타고니아 특급 열차』)[각주:9]이다. 세풀베다에게 산다는 것은 고통의 서사를 긍정의 서사로 고쳐 쓰는 일, 즉 ‘생쥐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는’ 우애와 연대의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 엄지영 옮김(열린책들, 2015).루이스 세풀베다의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 엄지영 옮김(열린책들, 2015).

“긴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삶이라는 건 길이가 아니라, 고양이와 생쥐처럼 서로 마음을 열고 얼마나 따뜻한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각주:10] 

세풀베다의 혀를 빌려 자연은 속삭인다. 탐욕은 절망이고, 사랑이 희망이다. 삶의 원칙은 얼마나 단순한가. 진리는 늘 명증하다. 세풀베다는 ‘연애소설 쓰는 노인’이었다. 그가 사랑한 대상은 지구. 애인의 품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을 그의 명복을 빈다.






  1. 『연애소설 읽는 노인』(정창 옮김, 열린책들, 2001). [본문으로]
  2. 『소외』, 권미선 옮김(열린책들, 2005). [본문으로]
  3. 『알라디노의 램프』, 권미선 옮김(열린책들, 2010). [본문으로]
  4. 『지구 끝의 사람들』, 정창 옮김(열린책들, 2003). [본문으로]
  5. 『감성적 킬러의 고백』, 정창 옮김(열린책들, 2001). [본문으로]
  6.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유왕무 옮김(바다출판사, 2000). [본문으로]
  7.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엄지영 옮김(열린책들, 2017). [본문으로]
  8. 『외면』, 권미선 옮김(열린책들, 2004). [본문으로]
  9.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정창 옮김(열린책들, 2003) [본문으로]
  10.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 엄지영 옮김(열린책들, 201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