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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문득문득 편집이야기

출판의 미래, 연결에 있다

“디지털 경제에서 우리는 자신이 일하는 영역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초예측』(웅진지식하우스)에서 프랑스의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 말한다. 일반적으로 ‘규모의 경제’는 물리적 재화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정의한다. 대량생산을 통해 생산원가를 낮추고 대량소비를 유도해 가격을 파괴함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원리다. 저렴하고 잘 훈련된 대량의 노동력, 큰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싸고 넓은 토지, 부채를 포함해서 동원 가능한 대규모 자본 등 세 박자를 갖추면 비용을 낮추고 시너지를 높여 규모의 경제를 이룩할 수 있다.


“재벌이라도 출판을 잘할 수는 없어. 출판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야.” 

고(故) 박맹호 민음사 회장은 늘 말하곤 했다. 출판인이나 편집자 들이 심장에 기록해 둘 만한 말이다. 출판은 태생적으로 소수 미디어다. 책에는 분명히 수백만 명의 정신에 영향을 주어 사회혁명을 일으킬 정도의 힘이 있다. 하지만 대다수 책들은 수천 명 정도의 독자가 만족하는 것으로 사회적 운명을 다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규모보다는 변화하는 세상에 적절히 반응하는 예민함이 출판의 진정한 가치를 이룬다. 

교과서, 학습지, 전집 출판사 등 ‘규모의 경제’를 적용할 만한 몇몇 영역을 제외하면, 출판사 전체가 중소기업 규모를 벗어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 최대의 단행본 출판 그룹인 문학동네, 민음사, 시공사 등이라 해도 한 해 매출액이 고작 400억 내외에 불과해, 다른 제조업 규모로 보면 중기업에도 속하지 못할 정도가 아닌가. 

다품종 소량생산. 이것이 출판의 눈부신 자부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기 어려웠기에 신문이나 방송 등과 달리 출판은 소수의 독자만 존재하는 책에도 기꺼이 자본과 노동을 투자했고, 공적 담론으로서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편집의 힘을 유지하면서 표현의 자유도 한껏 떠받치는 ‘책의 다양성’을 확보해 왔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을, 인간과 사물을, 즉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데 들이는 비용이 파격적으로 낮아지는 초연결사회에서는 지금껏 상상할 수 없었던 곳에서도 ‘규모의 경제’가 출현한다. 또한 이를 실행하는 단위도 집단에서 개인으로 줄어드는 중이다. 

출판과 같은 미디어 영역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연결가치’를 확보하기만 하면, 일인 미디어가 매스미디어를 능가하고, 독립출판이 전문출판을 압도하는 기적적 현상이 언제든지 일어난다. 지난 몇 해 동안의 베스트셀러 서적들이 이를 증언한다. 2015년에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이, 2016년에는 『초판본 진달래꽃』(소와다리)이, 2017년에는 『언어의 온도』(말글터)가, 2018년에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 등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연결의 힘으로 출판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종이책, 서점, 도서관 등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출판 유통 환경에서는 서로 발견하지도, 도달하지도, 소통하지도 못했던 독자들이 디지털 정보기술을 통해 서로 연결되면서 저절로 ‘규모의 경제’가 이룩된 것이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텀블벅 등 소셜 네트워크 도구나, 결집된 관심의 정치 사회적 무게 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책을 빌미로 자신의 정체성 가치를 표현할 기쁨을 주는 소소한 기회가 주어지면 충분하다. 이러한 독자들 움직임이 활발해짐에 따라, 요즘 출판계에서는 팬덤에 기반을 두고 좁은 영역에서 스몰 플랫폼을 직접 구축하거나 이미 구축된 플랫폼을 활용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려는 출판모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작년에 『회색인간』으로 화제를 모은 장르문학 전문출판사 요다는 『판타지 유니버스 창작 가이드』를 텀블벅에서 펀딩 중인데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면서 목표금액 500만 원을 넘겨 현재 6778만 5500원을 모았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책을 인쇄하기도 전에 4만 원짜리 책을 3000부가량 판매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문학동네)의 작가 이슬아는 학자금 대출 2500만 원을 갚으려고 월 1만 원에 전자우편으로 매일 에세이를 보내주는 ‘일간 이슬아’를 시작했는데, 구독자가 무려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 에세이들을 책으로 묶어 작년에 『일간 이슬아』을 독립출판 했는데, 현재까지 5000부나 팔려나갔다. 놀랍지 않은가.

초연결사회에서는 누구나 규모의 경제를 시도할 수 있다. 연결의 규모가 생기면 생산의 규모는 저절로 이룩된다. 독자와 연결되어 있다면, 무엇이 무섭겠는가. 출판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