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최근 문학계 트렌드는 ‘분량의 가벼움’이라 할 만하다. 경장편 소설의 인기에 이어 단편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짧은 소설’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들 소설은 손바닥 소설, 초단편 소설 등으로 불린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은 출간 한 달여 만에 1만 2000부를 인쇄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올렸던 짧은 소설을 모아 펴낸 이 책은 소설의 영역을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같은달 출간된 양진채 작가의 ‘달로 간 자전거’는 30여편의 짧은 소설을 담은 스마트 소설집이다. 200자 원고지 기준, 10장 내외로 압축돼 문장의 맛을 느끼기 좋고 길이는 짧지만, 서사를 갖춘 소설이라는 평이다. 어떤 것은 시(詩)보다 더 짧다. 양진채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짧은, 아주 짧은 소설들, 이미지로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절반을 썼고, 소설을 읽고 일으키는 파동이 절반을 쓰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두 작가뿐 아니다. 출판사들도 짧은 소설에 주목하고 있다. 출판사 걷는사람은 지난해 8월부터 짧은 소설을 모은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를 통해 호평 받고 있다. 시리즈 1권인 ‘이해없이 당분간’은 백민석 한창훈 이제하 조해진 백가흠 최정화 등 작가들의 글을 엮었다. 1권에 대한 세간의 호응에 걷는사람은 시리즈 2권 ‘우리는 날마다’를 세상에 내놨다. 가로 112㎜, 세로 185㎜로 외투 호주머니에도 들어갈 법한 크기의 책에 한 작품당 분량이 고작 다섯 장 안팎이다.
그런가 하면 민음사는 격월간지 릿터를 통해 ‘플래시 픽션’이란 이름으로 매호 주제에 맞는 짧은 소설을 작가에게 청탁해 선보이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도 매호마다 꾸준히 30매 내외의 짧은 소설을 1~2편 싣고 있다. 민음사는 2016년 12월, 일찌감치 200쪽 안팎 분량의 문고본으로 편집한 '쏜살문고' 시리즈를 시작한 바 있다. 출판사 열린책들도 지난해 국내 짧은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아멜리 노통브, 앙투안 로랭 등 프랑스 소설을 중심으로 ‘블루 컬렉션’ 시리즈를 내놓기도 했다.
■ 짧은 소설 인기는 왜?
이렇듯 짧은 소설의 인기는 왜 시작됐을까. 이미 전세계적으로는 짧은 소설이 유행 중이다. 오히려 국내에선 늦은 감이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외국에서도 ‘틈틈이’, ‘짬짬이’ 보는 콘텐츠가 사랑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장 대표는 “대개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노블, 로망 등으로 불리는 장편 외에는 안 읽는 추세였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며 아마존 등 전자책에서 짧은 소설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외국의 쇼트 스토리는 원고지 30매~50매 정도다. 스마트 기기 화면에서 보기 좋고, 짧게 읽으면서 그때 그때 감상을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 유행하면서 주요 장르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짧은 소설 붐은 최근 사랑받는 스낵컬처와도 직결된다. 국내 웹소설 시장의 성장이 출판계의 짧은 소설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게 출판업계의 중론이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 규모는 2013년 100억원, 2014년 200억원, 2015년 400억원, 2016년에는 1000억원으로 지속 성장해왔다. 특히 짧은 시간 안에 소비되는 특성과 주간 3~5회라는 빠른 발간속도가 바쁜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다는 분석이다. 웹소설만 봐도 짧은 소설이 갖는 성장 가능성과 수요층이 가늠된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다. 최근 출판 시장에 등장하는 짧은 소설들은 대부분 원고지 30매 내외, 6000자 정도를 넘기지 않는다. 독자로서는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되고 읽는 재미와 임팩트까지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덕에 호평이 줄을 잇는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작가들의 성향 및 스타일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반 단편소설보다 짧은 분량, 초단편 또는 손바닥 소설로 불리는 짧은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다.
■ "집중할 시간 없는 현대인에 딱" vs "결국 작품성의 문제"
출판사의 시각은 어떨까.
벌써 두 권의 짧은 소설 시리즈를 기획한 박찬세 걷는사람 편집장은 ‘이해없이 당분간’에 이어 2권 ‘우리는 날마다’ 역시 호평 일색이라 전한다. 그는 “배부량 판매율도 좋고 서점에서 독자들의 선호도도 높다”고 말했다.
박 편집장은 “이런 기획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촛불광장을 주제로 기획하려 했다. 시기상 늦은 부분이 있어 희망과 절망에 대해 얘기해보자 생각했다”면서 “짧은 소설들에 대한 수요가 있다. 요즘은 사람들이 집중할 시간이 긴 것 같지 않다. 이동하는 시간도 많고, 여행가서 단편을 읽기에도 분량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차 한 잔, 커피 한 잔 마시며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소설이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 맞지 않나 생각했고 수요층이 이를 뒷받침 한다”고 짧은 소설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걷는사람은 작가별 짧은 소설 모음집도 기획 중이다. 짧은 소설을 시리즈로 기획해 출간하는 곳은 아직까지는 걷는사람이 유일무이하다. 이에 주목한 걷는사람 측은 몇몇 작가들과 짧은 소설을 모아 내는 방안을 기획 중이다.
프랑스 문학을 중심으로 한 짧은 외서 시리즈 ‘블루 컬렉션’을 주간한 열린책들 김영준 문학주간도 같은 맥락에서 출발했다. 스마트 기기가 잠식한 시대에 독자들에게 다시 책을 쥐어주자는 취지로 ‘블루 컬렉션’ 시리즈를 기획했다는 것.
김 문학주간은 “요즘은 예전처럼 보기 좋은 하드커버 책이 독자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프랑스 소설들이 중편 소설 분량보다 조금 많은 경우가 많아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혀 살려 볼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컬렉션을 기획하게 됐다”면서 “독자 호응도 꽤 있고 절판상태에 있던 몇몇 책들이 이 기획을 통해 살아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8권을 모은 1차본에 이어 후속권 목록을 추리는 중인데 이 안에는 분량 등 성격만 적합하다면 신간도 시리즈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 김 문학주간 설명이다.
다만 김 문학주간은 요즘의 짧은 소설 인기에 편승한 기획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러 시도 속에서도 무엇보다 콘텐츠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는 “책을 잘 안 들고 다니는 세대에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상품, 가방이나 백 속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책이 유리한 점은 있다”면서도 “그러나 포맷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모아놓고 표지 디자인이 깔끔하다고 해서 당장 눈에 띄고 호응을 받는 건 아니다. 결국은 개별적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는지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길이의 문제가 아닌 작품의 완성도가 독자를 유입할 최선책이라는 것. 이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작품을 선별하는 김 문학 주간의 지조인 동시에 트렌드에 편승해 우후죽순 내놓는 일부 출판사들을 향한 일침이기도 하다.
■ 짧은 소설, 장르가 되기에 충분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짧은 소설 트렌드를 소설이 변화해가는 일종의 흔적이라 표현한다. 장 대표는 짧은 소설이 하나의 장르로 안착하고 동시에 독자 유입도를 높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얼마 전에도 ‘나는 세 줄도 못 읽어’ 이런 독자들에 대한 기사가 나왔더라. 이런 독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들에게 무조건 긴 작품을 손에 쥐어준다고 해서 책을 읽어주는 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짧은 소설은 독자가 문학을 읽는 습관을 기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면서 “독자의 취향도 굉장히 다양화될 거라 생각한다. 짧은 소설을 보고 ‘나는 장편을 좋아하지만 이 작품도 읽어봐야지’ 하는 독자도 있을 테고 ‘이런 소설만 읽어야지’하는 독자도 있을 터다. 새로운 독자층을 개발하는 동시에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확산 중이라 생각한다. 짧은 소설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짧은 소설 인기가 한시적 현상에 그칠 것이라든가, 작품의 완성도, 문학의 미학을 떨어뜨릴 것이란 일부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가 레이먼드 카버라든가, 오 헨리 등의 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나. 또 미학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기획 소설 등은 한계가 있지만 장르가 만들어졌으면 이 장르를 개척해가는 건 작가의 몫이다. 어느 장르나 상업적으로 만들었지만 작가가 이를 문학의 힘으로 이끌어왔다”고 짧은 소설이 가진 가능성을 언급했다.
기사입력 2018-01-3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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