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21호(2016년 8월 5일)에 「여는 글」을 썼다. 우치다 다츠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한다』를 읽으면서, 오늘날 출판의 가장 큰 적은 디지털이나 모바일이 아니라 반지성주의에 기반을 둔 ‘신봉건주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회의 부와 기회를 소수가 전적으로 독점하는 양극화는 철회되지 않을 것이고, 그 소수는 나머지 다수에게 타자와 더불어/함께 자유를 추구하는 대신에 말초적 쾌락에 혼몽을 꾸도록 유혹하는 짓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개돼지의 사육’이라는 교육시스템을 향한 가차 없는 전진이 이룩할 반지성주의의 범람. 책에 무척 적대적인 이런 흐름에 출판이 저항할 이유는 넘치도록 충분하다. 문제는 리더십일 뿐.
우치다 다츠루가 편집한 『반지성주의를 말한다』(이마, 2016)는 본래 일본 독자를 위한 기획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풍토에 대해서도 넘치도록 충분히 말을 한다. 세월호에서 사드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통한 공통 감각(상식)의 구축이라는 지적 경로를 무시 또는 경시하고 대중의 일시 동원을 통한 여론 조작, 소수의 전횡을 뒷받침하는 공권력 행사, 후세의 역사적인 평가만 되뇌는 결단주의를 사태마다 반복하는 지적 결핍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만도 아니다. 영국에서는 얄팍한 선동에 넘어가 브렉시트를 선택하고, 미국에서는 망발을 일삼는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된다.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쓰는 반지성주의는 지도자 개인의 터무니없는 성향이나 대중의 바보짓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의 기고자 중 한 사람인 시라이 사토시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는 포스트포드주의 사회, 즉 신자유주의 사회의 작동원리에 해당한다.
포드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근대적 기획을 실현하는 데 최적화한 시스템, 즉 제각기 다른 지적,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균질화’를 목표로 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모두가 중산층’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민주제의 진전, 생활조건의 전반적 향상 등 긍정적 효과와 동시에 인간의 대중화, 부품화에 따른 극단적 소외라는 처참한 결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과잉 생산에 따른 위기(공황)를 제 탐욕만 챙기는 식으로 극복하려다 세계 전쟁을 일으켜 인류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한계에 부딪힌 포드주의 시스템 이후 등장한 포스트포드주의 시스템은 알파고 같은 (슈퍼) 컴퓨터와 자동화 기술에 바탕을 둔 로봇 노동 등을 도입해 인간의 지적, 육체적 노동을 대체함으로써 대규모 숙련 노동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중산층이 붕괴하고 양극화가 격해지면서 새로운 계급사회가 출현한다. 고대 로마가 ‘빵과 서커스’를 정책으로 도입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 역시 사회불안 요소를 없애고 소비시장을 일정 규모로 유지하려고 이른바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등 각종 조처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지성에 대한 부인, “지적인 일 전반이 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발상”은 결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소수의 지적 엘리트는 글로벌 어딘가에서 가르쳐 충원하고, 나머지 대중한테는 인간됨의 근거를 이루는 교양교육 대신 신경의 말초를 자극하는 즐길거리가 부단히 제공될 것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스낵 컬처의 범람과 이를 부추기는 문화산업 정책의 줄기찬 도입은 전조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부 고위관료가 인간을 개돼지와 똑같이 사육하겠다는 기획을 부지불식중에 폭로한 일은 한 개인의 타락이나 실수만은 아니다. 바야흐로 반지성주의에 깊게 뿌리를 뻗은 신봉건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출판이 신봉건주의에 반드시 대항해 시급히 저항선을 펼치고 견고히 진지를 마련할 이유는 분명하다. 반지성화는 책 문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고도의 지적 구조체인 책은 지성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둔 오랜 훈련 없이 좀처럼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육을 바로잡아 지적 인간을 꾸준히 길러 내고, 독서를 일으켜 사회에 지성의 힘을 회복할 비상한 각오 없이 출판을 중흥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생존에 매몰되지 않고 교육과 독서와 출판을 한 줄로 엮는 거대한 비전으로 반지성의 물결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출판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 시대적 책무에 과연 누가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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