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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서평/절각획선(切角劃線)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편집을 생각하다

“내린다는 느낌보다는 공기 중에 가득한 느낌의 가랑비.”

새벽에 일어나 이케자와 나쓰키의 『문명의 산책자』(노재명 옮김, 산책자, 2009)를 읽다가 밑줄을 그어 두었는데, 예감일까, 하루 종일 이런 비가 홍동에 내렸다. 도서관 창밖으로 보이는 공기는 맑았던 어제와는 달리 무겁고 축축하지만, 힘껏 집중하지 않으면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이곳의 소리는 풍부하다. 멀리에서 끊임없이 산비둘기가 운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는 소리, 엄마를 따라 온 아이들 웃음소리, 건너편 도서관 회의실에서 중학생들이 토론하는 소리도 가끔씩 창턱을 넘어온다. 길 건너 논에서는 벼들이 낟알을 실어 고개가 휘어지기 시작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들의 색깔이 막 바뀌려는 참이다. 음력으로 표시하는 자연의 절기는 정확하다. 양력으로는 이른 추석이어서 햇곡을 걱정했는데, 이미 남녘에서는 추수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방미경 옮김, 민음사, 2014)를 다시 읽었다. 여든 살이 훨씬 넘은 고령이지만, 품격 있는 유머에 웅숭깊은 사유를 담을 줄 아는 특유의 감각을 전혀 잃지 않은 분명히 좋은 작품이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쫓기듯 후루룩 읽어 두었다가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다시 읽고 싶어서 챙겨 들고 왔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를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소설의 네 주인공 중 하나인 알랭의 말이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쉽지 않은 이 소설은 사실 알랭이 파리 거리를 걷다가 골반 바지를 입고 배꼽을 드러낸 아가씨들에 대해 매혹되는 데에서 시작해서 위와 같은 진술을 털어놓는 데에서 끝이 난다고도 볼 수 있다.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드러내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배꼽의 관능’에 대한 서사적 탐구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읽을 때에는 차라리 이쪽이 좀 더 마음을 끌었다. 『무의미의 축제』에는 관능의 존재들과 유혹의 존재들이 주고받는 온갖 신호들이 넘쳐 난다. ‘무의미의 축제’는 곧 바람둥이 축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알랭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카사노바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바람둥이 축제’는 맥이 빠져 있다. 타자와 구분하기 어려운 신체 중앙 한 곳(배꼽)에 온갖 에로틱한 감정들을 편집증적으로 모아들이는 이 시대의 사랑은 자신에게 고유한 사랑의 징표들을 가지고 둘만의 순간들을 창조하려고 골몰하는 개별성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랑은 무의미의 축제, 헛된 반복이 계속되는 축제가 된다. 

이 놀라운 포착력이 바로 쿤데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스쳐 가는 일상의 어느 한 부분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사건을 이어가고 사유를 불러들여 읽는 이들로 하여금 결국에는 일상의 높이와 깊이를 경험하게 하는 고도의 서사 전략. 사건의 풍부한 윤곽선은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있기에 문학은 죽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문학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은 농담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저열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미의 축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다시 명백하게 떠올리도록 해 준다.


그렇다. 문학이 있는 한, 글이 있는 한, 편집은 죽지 않는다. 출판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한 죽음을 선포하는 것은 패배자의 넋두리일 것이다. 설령, 세상 출판사가 모두 사라질지라도, 세상 서점이 모두 망해 버릴지라도, 책은 여전히 읽힐 것이고 편집도, 출판도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결코 종착이 있을 수 없는 우리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