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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후한서

[뉴스 속 후한서] [삶의 향기] 내 얼굴의 반쪽을 그린 초상(중앙일보)


어제 《중앙일보》 삶의 향기에 미술 평론가인 손철주 선생의 칼럼 「내 얼굴의 반쪽을 그린 초상」이 실렸다. 선생이 쓴 책과 글에 오래전부터 감탄해 오던 터라서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었다. 

친한 화가가 그려 준 얼굴 반쪽의 초상을 걸어 두고, 스스로 부족함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으리라는 내용이었다. 언제나 느껴 왔듯이 선생의 글에는 격조가 있는데, 특히 이번 칼럼은 조선의 선비가 쓴 족자를 걸어 두고 쓴 명(銘)을 읽는 기분이어서 더욱 깊은 맛이 들었다. 

칼럼 중간에 『후한서』를 인용한 부분이 있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전형으로 칭송받는 후한의 재상 유관(劉寬)의 이야기였다. 


내 평생의 병통을 요약하는 말이 있다. 바로 ‘질언거색(疾言遽色)’이다. 질언거색은 ‘나오는 말이 급하고, 낯빛이 금방 바뀐다’는 뜻이다. 이 생소한 한자어는 집안 조상 중 한 분인 ‘모당(慕堂)’의 문집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했다. 모당은 조선 중기에 오로지 서생으로 살다간 베옷의 처사이다. 그분 성미가 어지간히 조급했던 모양이다. 말은 자꾸 내달렸고 낯빛은 자주 변했다. 이러니 씨는 못 속인다. 무섭다. 내 병도 알고 보면 내림인 것이다.
모당은 질언거색을 뿌리 깊은 고질이라며 심히 자책했다. 그는 거처하는 곳에 경구 하나를 써놓았다. 그러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쳐다보며 반성했다고 한다. 그가 벽에 써 붙인 내용은 웬걸, 뜬금없다. ‘네 손이 국에 데지 않았느냐(羹爛汝手乎)’라는 글귀다. 왜 느닷없이 국이 어떻고 했을까. 이 말은 출전이 있다.
중국 후한 시대에 유관(劉寬)이란 관리가 살았다. 너르고 따뜻한 성품으로 신망이 높았던 사람이다. 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벌줄 때 그는 꼭 부들로 만든 채찍으로 때리라고 명했다. 부들 채찍이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누가 궁금해 묻자 그는 조용히 답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게 벌이다. 반드시 아파야 하겠는가. 부끄러우면 고칠 수 있다.”
유관은 언제나 느긋한 말투와 평온한 안색을 지녔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과연 어느 때 성을 내는지 알고 싶었다. 어느 날 하녀를 시켜 출근하는 유관의 관복에 뜨거운 국을 일부러 쏟게 했다. 하여도 유관은 태연자약했다. 엎어진 국그릇에 당황하는 하녀를 보고 그가 말했다. “네 손이 국에 데지 않았느냐.” 유관의 관후한 자품을 보여주는 일화는 『후한서』에 나오고 『소학』에도 등장한다. 모당이 써 붙인 글귀가 과연 효험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문집을 통독해봐도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


이 일화는 『후한서』 「유관전(劉寬傳)」에 나온다. 유관은 성품이 온화하고 관대했으며, 평생 남들과 세력이나 이익을 다투지 않았고, 또한 화를 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칼럼에 나오는 바와 같이 『소학(小學)』에도 이 일화가 실려 있어서, 조선의 선비들은 누구나 삶의 귀감으로 삼았다. 

칼럼에 소개된 유관의 일화 중 포편(蒲鞭), 즉 부들 채찍의 일화는 관대한 형벌을 통한 교화의 예로 아주 유명하여 고전 여러 곳에 인용되어 소개되는 말이다. 하지만 “죄를 깨닫게 하는 게 벌이다. 반드시 아파야 하겠는가. 부끄러우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은 뜻은 대강 통하지만, 유관전」에는 정확히 이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후세에 전승되면서 이런 식의 말로 바뀌어 알려진 모양이다. 유관전」에는 『논어』를 빌려서 “바로잡음을 형벌로 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고 나올 뿐이다. 갱란여수(羹爛汝手)의 일화는 물론 그대로 실려 있다. 이 기회에 유관전」 전체를 읽고 거칠게나마 아래에 옮겨 둔다. 


유관(劉寬)(주 1)은 자가 문요(文饒)이며, 홍농군(弘農郡) 화음현(華陰縣) 사람이다. 아버지 유기(劉崎)는 순제(順帝) 때 사도(司徒)를 지냈다.

일찍이 유관이 길을 가다가 소를 잃어버린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유관에게 이르러 [유관의] 수레를 끌던 소가 자기 소라고 우겼다. 그러자 유관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되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우겼던 사람이 자신의 소를 되찾고 난 후 [유관의] 소를 끌고 와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죄했다.

“어른을 부끄럽게 하다니! 어떤 벌을 내리든 따르겠습니다.”

유관이 말했다. 

“물건은 서로 닮은 바가 있고, 일은 착오가 있을 수 있소. 다행히 애써서 소가 돌아왔으면 되었지, 어찌 그 일로 [내게] 사죄하는 것이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그 보복하지[校](주 2) 않음에 감복했다.

환제(桓帝) 때, 대장군(大將軍)(주 3)이 불렀으며, 다섯 번 승진해 사도장사(司徒長史)가 되었다. 이 무렵 서울 낙양에 지진이 나자 특별히 [황제를] 알현해 자문했다. 

두 번 승진해 [조정을] 나가서 동해국(東海國)의 재상이 되었다.

연희 8년(165년), 부름을 받고 상서령(尙書令)으로 임명되었으며, 승진해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었다. 

세 군의 태수를 역임하면서 온화하고 어질고 용서를 베풂이 많았고,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에도 [당황해] 말을 빨리 하거나 분주한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다. [『논어』를 따라서] 늘 “바로잡음을 형벌로 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관리들과 백성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오직 부들로 만든 채찍을 써서 그들을 벌하면서 오로지 욕됨을 보일 뿐, 끝내 고통을 가하지 않았다. 일이 잘되어 공이 있을 때에는 늘 남을 추천하고 자신을 낮추었다. 때때로 재이가 일어날 때에는 [잘못을] 자신에게 돌려서 [하늘의] 책망을 이기려 했다. 속현을 순행하면서 정전(亭傳, 관리 등이 공무로 다닐 때 쉴 수 있도록 만든 처소)에 머물러 쉴 때마다 학관의 좨주(祭酒)나 처사를 불러들여 여러 학생들과 함께 경서를 손에 쥐고 강의를 들었다.(주 4) 부로(父老)를 보면 늘 시골 사람의 말을 써서 그들을 위로하고 어린아이를 보면 효제(孝悌)의 가르침을 권면했다. 백성들이 감화되어 덕행이 일어나니 날이 갈수록 교화되었다.

영제(靈帝) [등극] 초기에, 부름을 받고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어, 화광전(華光殿)(주 5)에서 시강(侍講)을 했다. [뒤에] 시중(侍中)으로 승진했을 때, 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 둔기교위(屯騎校尉)로 옮겼으며, 종정(宗正)으로 승진했다가 광록훈(光祿勳)으로 옮겼다.

희평 5년(176년), 허훈(許訓)(주 6)을 대신해서 태위(太尉)가 되었다.

영제는 학문과 기예를 몹시 좋아해서 유관을 불러들일 때마다 늘 경서를 강의하도록 했다. 일찍이 유관이 술에 취해서[被酒](주 7) 앉은 채로 꾸벅꾸벅 좋았다. 영제가 물었다. 

“태위는 취했는가?” 

유관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신은 감히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맡은 바는 무겁고 책임은 커서 근심하는 마음이 취한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영제가 그 말을 무겁게 여겼다.

유관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술을 좋아했으며, 세수하고 목욕하는 것[盥浴]을 좋아하지 않아서 서울 낙양 사람들의 뒷말에 오를 정도였다.

일찍이 손님과 앉아 있다가 노비를 보내서 시장에서 술을 사오라고 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迂久](주 9) [노비가] 크게 취해서 돌아왔다. 손님이 그 일을 참지 못하고 [노비를] 꾸짖어 말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잠시 후 유관은 사람을 보내 노비를 살피게 했는데, 그가 반드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짐승 같은 놈이라는 꾸짖음을 들었는데, 그 욕됨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나는 그가 목숨을 끊을까 봐 두렵다.”

[유관의] 부인이 유관이 화를 내나 시험해 보려 했다. 그래서 조회(朝會)가 열릴 때를 기다렸다가 유관이 옷을 모두 갖추어 입은 후 [나가려고 할 때] 여종에게 고깃국을 받들고 가서 일부러 쏟아서 옷을 더럽히게 했다. 여종이 황급히 그것을 닦아내려 하자, 유관은 얼굴빛조차 달라지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혹시 네 손이 국에 데지 않았느냐?”

그 성품과 도량이 이와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어른이라고 칭송했다.

나중에 일식 탓에 면직되었다. 위위(衛尉)로 임명되었다.

광화 2년(179년), 다시 단경(段熲)을 대신해서 태위가 되었다. 

세 해 동안 자리에 있다가 일식 탓에 면직되었다. 다시 영락소부(永樂少府)로 임명되었으며, 광록훈(光祿勳)으로 승진했다. 황건적(黃巾賊)의 역모를 먼저 알아채고[先策](주 10) 그 일을 황제에게 알린 공으로 향후(鄕侯)에 봉해지고 식읍 육백 호를 받았다.

중평 2년(185년), 세상을 떠나니 이때 나이가 예순여섯 살이었다.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인수를 추증하고, 특진(特進)의 지위를 더했으며, 시호를 소열후(昭烈侯)라고 했다. 

아들 유송(劉松)이 작위를 이었는데, 관직이 종정에 이르렀다.


(주 1)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유관은 어렸을 때 구양씨(歐陽氏)의 『상서(尙書)』와 경씨(京氏)의 『역경(易經)』을 배웠으며 『한시외전(韓詩外傳)』에 특히 밝았다. 성관(星官, 천문), 풍각(風角, 사방의 바람을 궁, 상, 각, 치, 우의 오음(五音)으로 감별해 길흉을 점치는 방술), 산력(筭歷, 산법(算法)과 역상(曆象)으로 곧 계산법을 말한다)은 모두 스승의 법을 궁극까지 탐구해 통유(通儒, 고금의 경전에 통달하고 학식이 깊은 유학자)로 칭송받았다. 일찍이 남과 더불어 세력이나 이익을 둘러싼 일로 다툰 적이 없었다.” 우각(隅角)이란 사방에서 부는 바람을 보고 점치는 것이다.

(주 2) 교(校)는 보(報), 즉 보복한다는 뜻이다. 『논어』에서 증자(曾子)가 말했다. “범해도 따지지 않는다[犯而不校].”

(주 3) 대장군은 양기(梁冀)를 말한다.

(주 4)『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박사좨주(博士祭酒)는 질이 육백 석이다. 좨주(祭酒)는 본래 복야(僕射)였는데, 한나라가 다시 일어났을 때 이름을 좨주로 고쳤다.” 처사는 학문과 기예가 있으나 [벼슬이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무르는 이를 말한다.

(주 5) 『낙양궁전부(洛陽宮殿簿)』에 따르면, “화광전은 화림원(華林園) 안에 있다.”

(주 6)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허훈은 자가 계사(季師)이며, 평여현(平輿縣) 사람이다.”

(주 7) 피(被)는 가(加), 즉 더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술을 과하게 마셨다는 말이다.

(주 8)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손을 씻는 것을 관(盥)이라 한다.”

(주 9) 우구(迂久)는 양구(良久)와 같은 말인데, 오랫동안이라는 뜻이다.

(주 10) 선책先策은 예지預知, 즉 미리 아는 것을 말한다.


후한서 본기 
범엽 지음, 장은수 옮김/새물결



원문을 아래에 붙여 둔다.

劉寬字文饒, 弘農華陰人也[一]. 父崎, 順帝時為司徒[二]. 寬嘗行, 有人失牛者, 乃就寬車中認之. 寬無所言, 下駕步歸. 有頃, 認者得牛而送還, 叩頭謝曰:「慚負長者, 隨所刑罪.」寬曰:「物有相類, 事容脫誤, 幸勞見歸, 何為謝之?」州里服其不校[三]. 
[一]謝承書曰「寬少學歐陽尚書、京氏易, 尤明韓詩外傳. 星官、風角、筭歷, 皆究極師法, 稱為通儒. 未嘗與人爭埶利之事」也. (隅)角, [隅]也. 觀四隅之風占之也. 
[二]崎音丘宜反. 
[三]校, 報也. 論語曰:曾子曰「犯而不校」. 

桓帝時, 大將軍辟, 五遷司徒長史[一]. 時京師地震, 特見詢問, 再遷, 出為東海相[二]. 延熹八年, 徵拜尚書令, 遷南陽太守. 典歷三郡, 溫仁多恕, 雖在倉卒, 未嘗疾言遽色. 常以為「齊之以刑, 民免而無恥」. 吏人有過, 但用蒲鞭罰之, 示辱而已, 終不加苦. 事有功善, 推之自下. 災異或見, 引躬克責. 每行縣止息亭傳, 輒引學官祭酒及處士諸生執經對講[三]. 見父老慰以農里之言, 少年勉以孝悌之訓. 人感德興行, 日有所化. 
[一]大將軍, 梁冀也. 
[二]東海王彊曾孫臻之相也. 
[三]續漢書曰:「博士祭酒, 秩六百石. 祭酒本僕射也, 中興改為祭酒.」處士, 有道蓺而在家者. 

靈帝初, 徵拜太中大夫, 侍講華光殿[一]. 遷侍中, 賜衣一襲. 轉屯騎校尉, 遷宗正, 轉光祿勳. 熹平五年, 代許訓為太尉[二]. 靈帝頗好學蓺, 每引見寬, 常令講經. 寬嘗於坐被酒睡伏[三]. 帝問:「太尉醉邪?」寬仰對曰:「臣不敢醉, 但任重責大, 憂心如醉.」帝重其言. 
[一]洛陽宮殿簿云:「華光殿在華林園內.」
[二]漢官儀曰:「許訓字季師, 平輿人.」
[三]被, 加也, 為酒所加也. 被音平寄反. 

寬簡略嗜酒, 不好盥浴[一], 京師以為諺. 嘗坐客, 遣蒼頭市酒, 迂久, 大醉而還[二]. 客不堪之, 罵曰:「畜產.」寬須臾遣人視奴, 疑必自殺. 顧左右曰:「此人也, 罵言畜產, 辱孰甚焉!故吾懼其死也.」夫人欲試寬令恚, 伺當朝會, 裝嚴已訖, 使侍婢奉肉羹, 汙朝衣. 婢遽收之, 寬神色不異, 乃徐言曰:「羹爛汝手?」其性度如此. 海內稱為長者. 
[一]說文曰:「澡手曰盥.」音管. 
[二]迂久猶良久也. 

後以日食策免. 拜衛尉. 光和二年, 復代段熲為太尉. 在職三年, 以日變免. 又拜永樂少府, 遷光祿勳. 以先策黃巾逆謀[一], 以事上聞, 封逯鄉侯六百戶[二]. 中平二年卒, 時年六十六. 贈車騎將軍印綬, 位特進, 謚曰昭烈侯. 子松嗣, 官至宗正. 
[一]先策謂預知也. 
[二]逯音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