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3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이 여성 과학 교수진에 대한 오랜 차별을 인정했다. 오직 객관성과 합리성만 작동할 듯한 이 유명 대학이 조직적으로 성차별을 일삼았다는 건 충격적이었다. 차별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고, 여성 우대정책도 시행 중이었다. 그러나 여성 과학자는 (특히 고위직에서) 눈표범처럼 드물었다. 속설대로, 여성이 과학이나 수학에 부적합한 존재인 까닭일까?
『숨겨진 여성들』(북스힐, 2025)의 저자인 미국 저널리스트 케이트 제르니케는 당시 ‘보스턴 글로브’ 기자로, MIT대 총장의 성차별 인정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기사는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대학, 정부 기관 등은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학계 전반의 분위기를 바꾼 대사건이었다.
차별이 밝혀진 데는 MIT 여성 과학자 16명의 비밀 협업이 결정적이었다. 중심엔 분자생물학자 낸시 홉킨스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학생이었으나, 그녀는 하버드대에 입학할 수 없었다. 하버드대가 여성을 받지 않아서다. 래드클리프 재학 시절, 답답한 미래에 방황하던 그녀는 우연히 제임스 왓슨의 생물학 강의를 들었다. 왓슨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성과를 가로챈 것이었다).
강의를 듣다가 홉킨스는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그녀는 “특권에 의한 죽음, 즉 졸업 후 결혼, 강아지, 아이, 교외의 삶” 대신 생물학자의 길을 택했다. 당시로선 역할 모델을 찾지 못할 만큼 드문 길이었다. 1960년대 말, 하버드대 종신 교수는 남성 295명, 여성 2명이었다. 그나마 여교수 급여는 예산 항목에서 ‘비품’으로 처리됐다.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한 낸시는 크릭에게 성희롱당하는 등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박사 과정에 들어간 여성은 교수들 만류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위를 받아도 친족등용금지법 탓에 일자리를 얻기 힘들었다. 남편과 한 대학에선 교수가 될 수 없기에 일과 가정 중에서 선택을 강요당했다. 자리를 얻어도 불리했다. 임신을 이유로 해고되거나, 연구실 잡일이나 보조원 역할만 주어졌다. 가부장제 환경에서 여성 과학자 되기는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원서의 제목대로, 여성 과학자는 정상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 즉 예외들(exceptions)이었다.
다행히 1972년 ‘타이틀 9’ 법안이 통과돼 연방 정부 자금을 받는 고등교육기관의 성차별이 금지됐다. 닉슨 정부는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하고 승진시키는 우대 계획을 내놓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고 대학을 압박했다. 많은 대학이 형식적이라도 여성 교수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MIT도 서둘러 ‘잊힌 사람들’인 여성 과학자를 찾았다. 학생 시절부터 탁월한 연구 성과를 보인 홉킨스는 그 우대 계획의 혜택을 받아서 채용됐다.
교수가 된 홉킨스는 난감한 현실과 부닥쳤다. 학내에 직급, 월급, 연구실 공간, 지원금 등을 둘러싼 미묘한 차별이 만연했다. 남성 교수들은 신규 교수 임용 과정에서 그녀를 따돌렸고, 수시로 업적과 아이디어를 가로채기도 했다. 바라는 걸 얻으려면 수시로 학과장이나 대학 직원과 다투고 싸우며 까탈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하소연해도 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홀로 고민하던 홉킨스는 다른 여성 교수들과 만나서 이 문제를 토로했다. 혼자 있을 땐 “너무 작은 문제” 또는 개인적・실존적 문제(“내 능력 부족일까?” “내 성격이 나쁜 걸까?”)였던 일이 함께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집단적・조직적 문제임이 드러났다. 그녀와 동료들은 과학자다웠다. 이들은 힘을 합쳐서 4년 동안 비밀리에 데이터를 모았다. 줄자를 꺼내 실험실 공간을 재고, 고가 장비 숫자를 세었으며, 월급과 지원금 명세를 살폈다.
그러자 차별이 객관적 수치로 드러났다. 여성 교수는 같은 직급의 남성 교수보다 월급은 적고, 낮은 직급의 남성 교수보다도 좁은 연구 공간이 배정됐다. 주요 위원회에서 배제됐고, 인기 수업을 빼앗겼으며, 경력 개발에 필요한 학내 비공식적 사교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차별이 쌓이면 차이가 뚜렷해지고 간격이 커진다. 그 탓에 여성 과학자들은 업적 평가와 승진 심사에서 밀려나 남성들보다 종신 교수가 되기 힘들었다. 결국 높은 직급의 여성 과학자가 극히 드문 것은 개인 능력이나 상황보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차별적 시스템 탓이었다.
이 책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독자들을 대학과 실험실 공간으로 데려가서 여성 과학자들의 고립과 절망, 좌절과 분노에 이입시킨다. 엄정하고 침착했던 여성 학자들을 예민하게 하고, 짜증을 부리게 하며, 소리 지르게 만든 건 호르몬이 아니라 학교의 구조적인 차별이었다. 여성 과학자들은 ‘지적 연대’를 통해 “노골적 괴롭힘이나 협박 없이도 차별이 얼마나 만연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 명확하게 입증”했다. 이러한 조직의 차별에 압도적 실력을 키워서 이를 입 다물게 하는 건 어리석다. 오직 연대를 통해서만 조직을 바꾸고, 문화를 고칠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새삼스러운 건 MIT의 공식 대응이었다. 객관적 수치가 제시되자, 총장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임을 인정하고, 학내 시스템 개혁에 착수했다. 덕분에 하룻밤 사이에 MIT는 성평등을 주창하는 대학의 선도자가 되었다. 후원금도 쏟아졌다. 명예를 지키려면 언제나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구질구질하게 구는 대신, 이를 빠르게 시정하는 것뿐이다.
'평론과 서평 >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종소리서 일제 사이렌으로, 시간은 어떻게 강제되었나 (2) | 2025.02.14 |
---|---|
무해함에 대하여 (0) | 2025.02.04 |
국가 지도자의 ‘전략적 멍청함’… 어떻게 나라를 망쳤나 (1) | 2025.02.04 |
참된 행복은 무위(無爲) 속에 있다 (0) | 2025.02.04 |
금수저 연예인이 늘어나는 이유 (1) | 2024.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