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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가독성에 대하여 ― 《기획회의》 352호(2013. 9. 20)를 읽고


도저히 글을 쓸 만한 틈을 낼 수가 없어 블로그에 소홀해졌다. 잠깐 숨을 돌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메모해 두려고 한다.《기획회의》야 늘 오자마자 그 자리에 읽어 치우는 편이지만, 352호에 실린 글들을 읽다가 밑줄 그어 둔 구절들을 정리할 마음을 품은 것은 평소에 고민해 왔던 ‘읽기 공동체’와 ‘가독성’ 문제를 다룬 글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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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수의 여는 글 「각자도생을 넘어 학습 연대로」는 흥미로운 글이다. 평소에 출판의 뿌리는 읽기 공동체에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20대 청년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진행 중인 읽기 공동체의 해체를 막아 내지 않고는 출판은 후속 세대를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장차 그 인간적 기반마저 상실하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서 책이 그 안에 품고 있는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최초의 통로마저 서서히 막혀 버릴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사태는 현재 한국 출판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홍세화가 “우리 시대 진보에게 필요한 건 ‘투쟁’이 아니라 ‘공부’라며 학습협동조합 ‘가장자리’의 설립을 주도”했다는 소식은 상당히 예리한 현실 인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잘되기를 바란다.

“이제 골방의 독서에서 광장의 독서로 자세와 환경을 바꿔야 한다.”라는 신기수의 제안은 읽기의 위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대안이다. 그러나 필자 본인도 곧바로 경계하듯이, 광장이라는 수사가 흔히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꾸며 내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거대 네트워크야말로 책의 적이다.

오늘날 읽기는 어느 때부터 풍성하면서 동시에 어느 때보다 허약하다. 위기에 빠진 것은 읽기 그 자체가 절대로 아니다. 사람들은 읽기를 멈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량 읽기의 지옥에 빠져 있으며, 실제로 외면하는 것은 오로지 책 읽기뿐이다. 거대 네트워크에서 끊임없이 공급하는 읽기 다발들에 질식해서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것이고, 그 탓에 책은 DMB나 카톡이나 게임 등에 밀려 사람들의 시간을 점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엄중한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관료적 의무, 도덕적 열정, 상업적 기획에서 시작된 모든 독서 운동은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이제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 읽기에 읽기 그 자체 이상의, 더 커다란 기쁨을 돌려 주어야 한다. 물론 책 읽기는 내면의 영혼을 직접 파고든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문화 행위를 압도하는 경험을 제공하지만 그 경험으로 이끄는 통로를 개인이 확보하는 것에는 어쩌면 보통 교육을 비교적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고된 훈련 과정이 오히려 기쁨이 되는 세계의 구축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힘써 이룩해야 하는 협동의 과제일 터이다. 이것은 아마도 전체로서는 이룩할 수 없고, 스승과 선후배와 친구와 가족이 하나로 연결되는 지역적 공동체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노동이 기쁨이 되는 이 불가능한 과제를 실제로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네트워크화한 삶이 거세해 버린 지역적 삶과 결합하지 않는 한 책 읽기는 지속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출판사와 서점이 지금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아마도 지역성과 결합해 그곳에서 읽기 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일 터이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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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가 쓴 「‘어떻게’라는 질문의 답을 기대한다」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 김정근, 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1)에 대한 서평이지만, 최근의 편집 문화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북바이북, 2013)이 촉발한 특집 “굿바이, 자기계발”보다 이쪽이 훨씬 흥미로웠다. 다소 길지만, 중요한 문제 제기이므로 인용해 보자.


그런데 책을 넘기면, 물리적인 측면에서 이 책은 제목의 강렬함을 잇지 못하고 있다. 본문 디자인은 푸른색을 활용한 별색 인쇄를 전반적으로 취하고 있는데, 산만하다.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음영을 짙게 드리웠고, 각 장의 시작은 푸른색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소제목이나 본문의 어떤 내용들은 굵게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저자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요약해 주고, 그 요약 때문에 본문의 가독성이 오히려 떨어지면서 본문 안의 긴박한 상황들을 ‘전황 보고서’처럼 읽게 만든다.

조금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장치는 전황 보고서가 아니라 ‘사례 모음집’처럼 읽히게 만든다. 이 점이 본문 그 자체의 흐름이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본문 디자인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음이 조금 바쁜 사람들이라면 눈으로 급하게 훑으면서 읽을 수도 있다. 출판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인 ‘벙벙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런 점들은 본문이 치밀하고 꼼꼼하고 섬세하게 쓰인 책이라기보다는, 다급한 상황에서 급히 쓰인 듯한 인상을 준다. (52~53쪽)


실제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읽어 본 편집자들은 아마 이 정도 편집을 보고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알라딘의 미리보기 페이지) 그것이 현대의 편집 문화가 어떤 편향에 빠져 있다는 한 증거가 된다. 요컨대 오늘날 한국의 편집 문화는 가독성을 희생하는 방향으로, 독자로 하여금 책을 천천히 읽어 몰입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를 편집 장치를 통해 실현하는 편집보다는 정윤수가 지적하듯이 전황 보고서처럼, 사례 모음집처럼 훑어보게 만드는 잡지식 편집에 악령 들려 있다. 심지어 이 책과 같은 인문학적인 서적조차도 그런 식의 읽기를 독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하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의 본질에 대한 치열한 자기 고민이 빠진 상태의 편집, 훑어보기로도 독서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실용서의 편집 장치들이 다른 모든 책을 집어삼키는 편집이 횡행하는 세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편집자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도 세상에 말한다는 것이 망각된 세계, 한국 출판은 그러한 세계에서 지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마침 서평이 실린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철학은 전쟁이다』(김병욱 옮김, 사람의무늬, 2013) 속의 한 구절이 하나의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이지만, 흐릿하고 구겨져 있어 읽을 수가 없다. 얼핏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심지어 숨기까지 하는 그 가독성을 보이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나, 체계다. 


가독성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숨기까지 하는 것이다. 보려고 해야 보이는 것이고 찾으려고 해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미리 보여 주는 것은 독자의 주체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체계는 책 속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영혼 속에서 건축되는 것이다. 편집자란 아무 일도 안 한 것처럼 편집함으로써 이를 도울 수 있을 뿐. 후배 디자이너 유지원의 인터뷰에서 뽑은 말로 글을 끝맺기로 하자.


이하영 ― 책을 즐겁게 읽는 걸 방해하는 건 뭔가요?

유지원 ― 번역체 문장 그리고 잡지식 편집? 물론 잡지는 보는 거니까 가독성이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사람이 한 줄에서 읽을 수 있는 글자 수는 한정돼 있는데, 그 글자 수가 마구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행간이라도 충분히 확보해 줘야 하는데 행간도 좁아서 어느 줄로 넘어가야 하는지 모르게 빽빽하게 되어 있어서 쓸데없이 뇌와 눈을 피곤하게 하는 편집, 그런 거죠. (117~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