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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슈타이들조차 책을 만드는 데에는 편집자가 필요하다


슈타이들조차 책을 만드는 데에는 편집자가 필요하다

― 대림미술관의 슈타이들 전시회를 다녀와서



전시회 관람을 그 자리에서 끝내는 것은 대개의 경우 무척 어리석은 일이기 쉽다. 물론 현장의 생생함이 만들어 내는 활기 찬 리듬, 눈을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와 그들을 빚어 내는 공간의 놀라운 조화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장의 인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법이라서 며칠 또는 몇 주의 시간이 지나면 메모 몇 줄과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몇 덩이 생각들로 약화된다. 윤곽선은 희미해지고 느낌은 잔잔해진다. 현장의 감격은 사라지고 냉냉한 분석만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또 알고 있다. 인상이란 우리를 속이기 쉽다는 것을, 진정한 전시회는 도록을 읽는 육체 노동과 사색의 시간을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어떤 전시회는 오로지 도록을 통해서만 완전해지고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을. 

대림미술관에서 지난 4월 11일부터 열고 있는 슈타이들 전시회는 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준다. 슈타이들은 독일의 오래된 도시 괴팅겐의 한 인쇄소 겸 출판사로, 귄터 그라스, 로버트 프랭크, 칼 라거펠트, 에드 루셰 등 전 세계 일급 예술가들과 작업하면서 장인적 출판 정신을 고수하여 대량 인쇄되는 책을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으로 생산해 내는 곳이다. 이번 전시회는 이러한 슈타이들의 작업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슈타이들은 종이, 서체, 판형, 인쇄 등 출판의 모든 물리적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예술가들이 자신의 책을 머릿속 한 구석의 구상에서 물질적 형태로 실현해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을 완벽하게 돕는다. 사실 모든 편집자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기는 하지만, 비용이나 시간 등 여러 현실적 이유 때문에 타협해 책을 고유한 개별성을 지닌 예술품이 아니라 대량생산된 일용품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슈타이들은 특별하다. 그들은 책의 물성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책을 아름다운 창조물로, 슈타이들의 말을 빌리면 “멀티풀 아트(Mulitiful Art)”로 전환시킨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고, 이 전시회의 모든 것이다. 

이 특별한 전시회에서는 과거 5세기 동안, 아니 중국 송나라 때의 출판 혁명을 고려하면 거의 10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종이 미디어의 품격을 눈으로, 손으로, 그리고 슈타이들이 늘 강조하듯이 무엇보다 냄새로, 그러니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라고 슈타이들에서 책을 냈던 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가 말했다면, 슈타이들은 아날로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현대적 전범으로 남았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슈타이들의 작업 방식은 출판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이 전시회에서 도록의 존재는 정말로 특별하다. 스스로 예술 작품이 되었다 할지라도 슈타이들은 무엇보다도 출판사인 데다 오직 책을 통해서만 전시의 대상, 즉 예술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슈타이들 본인도 말하지 않았는가. 책이란, “예술가의 아이디어가 기술 장인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게다가 전시회에서 보여 주는 정보는 시각적으로는 비교적 풍부했지만, 읽을 만한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한테는 증거가 필요했다. 물론 슈타이들이 공들여 만든 다른 수많은 책들을 팝업 스토어 형태로 판매하고 있었지만, 슈타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은 도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슈타이들이 직접 제작했다는 이 도록(How to Make a Book with Steidl)에는 슈타이들의 작업 공정을 화면으로 보여 주는 DVD도 딸려 있어서 편집자인 나의 호기심을 결정적으로 끌었다. 

사실 슈타이들 전시회의 백미는 전시 자체가 아니라 도록이다. 이 도록은 슈타이들의 작업 방식 깊숙한 곳에 있는 영혼의 정수를 다루고 있다. 당신이 전시만 보고 이 도록을 읽지 못했다면, 붉은 껍데기만 보고 속살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게가 맛있다고 설레발치는 것과 같다. 이 도록은 출판이 본래 정신노동이 아니라 육체노동이었음을, 편집과 디자인이 인쇄 및 제본과 하나였음을, 그리고 그 노동에 대한 정신적 숙고를 통해서만 비로소 정신노동으로 승화할 수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기계평론가 이영준의 아름다운 추천사 「슈타이들이 지키고 있는 종이의 시간」으로 막을 연 이 멋진 책은 사실 편집자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하면서 읽어 볼 만한 좋은 정보들이 많이 들어 있다. 얀 치홀트와 발터 벤야민의 글은 쓰인 지 오래된 고전이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빛을 발하면서 오늘날의 편집자와 디자이너 들에게도 한없는 영감을 준다. 코토 블로프의 글은 슈타이들의 일상을 사진과 글로 깔끔하게 재구축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되었던 짐 다인, 로버트 프랭크, 귄터 그라스, 칼 라거펠트, 에드 루셰, 다이아니타 싱 등의 작업도 지면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편집자 몬티 팩컴이 인터뷰한 슈타이들의 작가들(로버트 폴리도리, 요아킴 에스킬센, 유르겐 텔러, 로버트 프랭크와 준 리프, 클라우스 슈택, 데이비드 베일리, 다이아니타 싱)은 이 출판사의 작업 철학과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계적 예술가들의 사유와 재치를 엿볼 수 있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기록이 된다.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네 편의 글은 슈타이들의 작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슈타이들이 지향하는 출판 정신이 어떻게 일상의 작업 속에서 구현되어 가는지를 감동적으로 잘 보여 준다. 부록으로 제공된 요르그 아돌프와 게레온 베첼의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편집자나 디자이너라면 1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넘친다.

DVD 영화에는 쉴 새 없이 전 세계를 날아다니면서 작가들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대량 생산되는 책들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밀어붙이는 슈타이들의 완벽주의적 작업 방식, 그중에서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잭 캐루악의 소설 텍스트에 북 아티스트 에드 루셰의 사진과 디자인을 하나로 합친 한정판 작품집 『길 위에서(On the Road)』를 제작하는 과정(350부만 제작된 이 작품집의 가격은 무려 1만 달러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슈타이들은 이 책의 가격이 조만간 오를 것이기 때문에 수집가들의 호기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그러니까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 대로 일하자고 말한다.)은 우리 시대 편집자들의 호기심과 죄책감과 투지를 자극해 단숨에 슈타이들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길게 도록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이 도록의 가치가 대림미술관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도록의 제작 상태는 상대적으로 완벽하다. 도록 자체는 슈타이들이 해 왔던 작업 자체의 훌륭한 결과물인 것이다. 부드러운 종이의 촉감, 풍겨 나오는 매력적인 책 냄새, 본문과 사진의 인쇄 상태 등은 이 시대 다른 출판사들이 쉽게 재현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를 풍기고 있다. 슈타이들의 완벽주의적 작업 방식을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는, 전시회의 정수를 드러내는 화신과 같은 책인 것이다.

그러나 이 도록 자체가 제대로 된 편집 과정이나 교정 교열 없이 출판된 것은 우리 시대 출판산업의 어두운 운명을 보여 준다. 책을 예술품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 과정을 보여 주려는 책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 것은 정녕 거대한 아이러니다. 만약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면, 이 책에 악마는 절대로 없다. 슬쩍 훑어만 봐도 알겠지만, 이 도록에는 어떤 편집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슈타이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비용 절감 때문이겠지만, 책에 대한 식견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아마추어들이 최고의 전문가와 함께 작업하고서는 의기양양한 꼴이다. 가히 여우가 호랑이인 척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편집자 없이 만들어지는 책이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보여 주는 산 증거가 되어 버렸다. 가독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서체의 선택, 한글의 정보 처리 능력을 생각하지 못한 깨알 같은 크기의 활자에 놀라울 정도로 좁은 행간과 마치 바다처럼 넓어 보이는 단 길이는 이 도록이 읽힌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본문의 어마어마한 번역 상태와 교정 교열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얀 치홀트의 “The Art of Making Books”를 「예술로서의 책 만들기」로 옮긴 것은 하나의 위트라고 생각했겠지만, 책이란 예술가들의 아이디어가 기술 장인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는 슈타이들의 말을 떠올렸다면 결코 이렇게 옮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는 이 도록을 만든 사람들이 사실상 슈타이들을 거의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슈타이들은 예술로서의 책 만들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장인(기술자)의 협업으로서의 책 만들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그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작은 시작일 뿐이다. 책의 세부는 더욱 견디기 어렵다. 여기에 굳이 옮기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맞춤법, 외래어표기법 등 편집자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기초적인 오탈자가 거의 모든 꼭지마다 눈에 띄는 데다 띄어쓰기는 정녕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친다. 문장의 교열 상태나 번역 수준도, 조금 과장하자면, 괴기 수준에 가깝다. 슈타이들의 작업 방식은 아마도 이 도록을 통해 오히려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이것이 현대의 출판이 처해 있는 비참한 운명이다. 슈타이들은 말한다.

“만약에 당신이 오늘까지의 책 제작을 확인해 보면, 대부분의 책들이 보기 흉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책들은 잘못된 조판, 조악한 디자인과 인쇄, 질이 떨어지는 제본으로 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출판사에서 최대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품질로 만들어졌습니다. 서구의 출판사들은 인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같이, 외부에서 좀 더 싸게 인쇄할 수 있는 곳만 찾으려고 하지요. 출판사들은 그저 최저가만을 찾지요. 열정은 없고요.”

이 도록이 만들어진 상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슈타이들이 직접 제작한 것이기에 아마도 디자인, 인쇄, 제본이야 훌륭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텍스트를 한국어로 읽을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편집된 텍스트 상태를 알았다면 과감하게 인쇄나 제작을 거절하지 않았을까. 슈타이들은 다시 말한다.

“요새 누가 카탈로그를 읽습니까? 사람들은 카탈로그를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들은 페이지를 휘리릭 넘깁니다. 카탈로그는 형편 없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미술관은 더 이상 카탈로그를 위한 자금이 없고 편집은 끔찍합니다.”

그렇다. 이 슈타이들의 도록조차도 이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슈타이들의 실수는 아닐지도 모른다. 대림미술관 측에서 단 한 사람의 편집자라도 이 작업에 동참할 기회를 주었다면 결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열정이 넘치는 편집자들이 많이 있고, 그와 협업하는 좋은 번역가들도 넘친다. 아마도 이 훌륭한 전시회가 이런 끔찍한 도록으로 끝맺은 것은 오로지 미술관의 비용, 그러니까 돈 탓일 것이다.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