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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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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우리를 바꾼다 『뉴욕 3부작』의 세 작품에서 화자는 모두 누군가를 추적하고, 흔적을 관찰하며, 그 결과를 꼼꼼하게 공책에 기록한다. 글쓰기는 잊힌 자아를 환기할 계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처음에 타인의 관찰로 시작된 기록은 사건 진행과 함께 묘하게 자신과 세계에 대한 기록으로 변해 간다. 블루의 말처럼, “길 건너에 있는 블랙을 염탐하는 일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저 남을 지켜보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보는 일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현재만 존재하는 뉴욕의 속도에 포섭된 후, 블루한테는 한순간도 자신을 돌아볼 때가 없었다. 블루는 말한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
[풍월당 문학강의] 누가 이 여인을 악녀라고 부를 것인가 ―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그런데 애들을 왜 죽였소?” 아르고호를 타고 멀리 동방으로 모험을 떠나서 황금양털을 가져온 이아손이 울부짖습니다. 그는 헤라클레스와 함께 신화시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웅입니다. 이아손의 배신에 치를 떨다가 가장 사랑하는 두 자식마저 복수의 제물로 내놓은 메데이아가 결연히 대답합니다.“당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죠.”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상대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 주려는 생각에, 자신의 영원한 파멸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새로운 지혜’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순간적 격앙’의 산물일까요. 메데이아는 말합니다.“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나는 안다. 그러나 격정이 나의 숙고보다 더 강력하니, 격정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의 원인이로다!” 한 ..
[풍월당 문학강의] 피의 값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잘 알아두시오.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 나도 모르겠소. 내 비록 고삐를 잡고 있기는 하나 말들은 이미 주로 밖으로 멀리 벗어난 느낌이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 치고, 내 가슴속에는 벌써 공포가 노래 부르며 격렬한 춤을 추려 하니 말이오. 아직 정신이 있을 때 친구들에게 말해두고 싶소.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소.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1021~1027행)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몫의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타고난 운명을 거부하고 자기 운명을 새롭게 쓰려는 영웅들의 분투는 비극적 파멸을 불러들이죠. 하지만 영웅들의 불쌍한 최후는 우리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터질 듯한 희열과 고귀함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
[풍월당 문학강의] 인간은 모두 블라디미르이거나 에스트라공이다 -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 씨가 오늘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저녁이 되면 소년이 온다. ‘내일’이 선포되고, ‘오늘’이 또다시 지나간다. “밤을 기다리고, 고도를 기다리고…… 또 어쨌든 기다리는……” 내일이 오늘과 똑같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밤이 지나 다음 날이 오면, 도돌이표처럼 붙박인 하루가 또 온다. 오늘이 찾아오면 내일이기를 바라지만, 그 내일이 다시 오늘과 다르지 않다. 그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들 블라디미르와 우리들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고, 또다시 소년이 온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한 달에 한 번,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고전문학을 같이 읽습니다. 요즈음 같이 읽는 것은 ‘실존의 문학들’입니다. 헤밍웨이의 『노..
꼰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 《중앙선데이》에 한 달에 한 번 쓰는 칼럼입니다. 지난달, 풍월당에서 강의했던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 일종의 ‘문학적 꼰대론’을 써 보았습니다. 강의를 위해 반복해서 작품을 읽다 보니, 사르트르가 평생에 걸쳐 싸웠던 삶의 실체, 이른바 부르주아적 삶에 깃든 역거운 허위의식의 실체가 조금은 들여다보이는 듯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죠.《중앙선데이》 편집이 바뀌어서 조금 손보았는데, 아래에 전문을 옮겨 둡니다. 꼰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인가 “40대가 넘으면 ‘경험의 직업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
[풍월당 문학강의] 어떻게 이 부조리한 생을 사랑할 것인가 3 ― 사르트르의 『구토』 한 작품마다 특별히 사랑하는 구절이나 장면이 있습니다. 작품의 전체 맥락이나 주제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서 잊히지 않는 장면들입니다. 『구토』의 경우에는 로캉탱이 오랜만에 온 안니의 편지를 읽은 후에 하는 짧은 회상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던 동안, 우리의 가장 짧은 순간도, 또 가장 작은 걱정거리도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우리의 뒤에 남는 것을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다. 소리, 냄새, 그날의 기분,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는 생각까지도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안고 살았으며, 모든 것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현재로서 즐기고 괴로워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추억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늘도 없고, 후퇴도 없고, 피할 곳도 없는..
[풍월당 문학강의] 어떻게 이 부조리한 생을 사랑할 것인가 2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문학을 왜 읽고 또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 죽도 밥도 안 되는 언어들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이토록 매혹하는 걸까요. 문학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아무래도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의문들을 마음에 담아서 한 달에 한 번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고전문학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요즈음 같이 읽는 것은 실존의 문학들입니다. 지난달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고, 이달에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습니다. 이 작품들은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힌 우리 비루한 현대인들에게 참된 용기와 자유를 연습하게 해줍니다. ​ 강의 신청은 여기서 해주세요. http://www.pungwoldang.kr/board_lec/con..
[풍월당 문학 강의] 부조리한 이 생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문학은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없듯이, 문학을 읽지 않으면 삶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한 달에 한 번,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풍월당 아카데미에서 문학의 고전들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2015년에 처음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두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올해 초에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길가메시 서사시』 등 이야기의 기원에 관한 책들을 같이 읽었고, 이달 4월부터는 새롭게 삶의 부조리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첫 번째로 고른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어서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 달에 한 작품씩 연속으로 읽을까 합니다.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