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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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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매카시즘 리처드 에번스의 『에릭 홉스봄 평전』(책과함께, 2022)에서 사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극단의 시대』의 프랑스어판 출간을 둘러싼 이상한 논란이었다. 알다시피, 20세기 역사를 다룬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영국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비판적 논쟁과 함께 열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갈리마르, 알뱅 미셸, 파야르 등 프랑스 주요 출판사들이 제작비, 번역비 등을 이유로 이 책의 출판을 거부한 것이다. 전작인 『혁명의 시대』가 기대보다 안 팔린 이유는 분명히 있었으나 핑계였다.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극단의 시대』가 소비에트 중심으로 기울어져 미국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서구 민주주의를 폄훼하는 등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극단의 시대』가 유대인 학살과..
편집자의 일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아마도 이상적인 출판사의 미래 모습은 저자가 제공하는 원자재인 원고를 다듬는 1차 산업, 책에 담긴 콘텐츠를 온라인 제품으로 재가공하는 2차 산업, 이를 다시 파생상품(만화, 게임, 영상자료)으로 연출하는 3차 산업이 한 지붕 아래 종합상사처럼 집합한 형태일 수도 있다. 출판사 편집자는 더 이상 잘 팔리는 필자 섭외와 오탈자 교정으로 전문성을 낭비하는 대신에, ‘열린 책’인 하이퍼텍스트의 건축가 또는 디자이너로 자신의 직업의 본질을 바꾸어야 한다. 마셜 맥루한이 창안한 고전적인 개념을 빌리자면, 책(문자)이 대변하는 ‘차가운 매체’와 영화(영상)가 상징하는 ‘뜨거운 매체’의 경계는 사라지고 ‘보이는 라디오’와 ‘읽어주는 오디오북’처럼 하이브리드 뉴 미디어가 지배하는 신세계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
편집자로 일하면 좋은 세 가지 이유 편집자는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최고의 직종이다. (중략) 첫 번째, ‘재능 칵테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편집자는 한 번이라도 대면하면 인생을 격변시켜 줄 만한 천재들을 매일 만난다. (중략) 독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편집자다. (중략) 두 번째,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편집자의 일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상품의 기능이나 가격에서 큰 차이가 없다. 앞으로는 ‘상품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중략) 그것은 편집자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중략) 세 번째, 사람의 감정을 감지하는 후각을 연마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에 울고, 무엇을 고민하고, 무..
독서공동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 같이 읽고 함께 사는 삶을 찾아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 독자들을 실감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였다. 편집자들은 솔직히 말하면 독자를 잘 모른다. 편집자로 일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이 격절, 독자로부터의 소외는 심해진다. 때때로 저자 강연회, 사인회, 애독자 모임 등에서 독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관계자 입장이니 선뜻 속마음을 듣기가 어렵다. 독자들은 늘 저 너머에 있다. 책은 분명히 독자들한테 가 닿지만, 독자들은 항상 모니터 건너편이나 판매부수 이면에 흔적으로 존재한다. 편집자는 스스로 자기 분야 책들의 독자가 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격차가 섬뜩할 정도로 벌어지곤 한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과 독자가 읽으려는 책이 천만리 멀어지는 것이다. 나가던 책이 안 나가고, 팔리던 책들이 줄어든다. 초판 ..
출판과 종교(필사에서 종교로, 금속활자에 대하여)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낼 만큼 오랜 출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 수도사의 일과가 성경을 베껴 쓰는 일과 기도로 이루어졌듯이, 고려의 승려도 경전을 직접 베껴 쓰며 사경을 제작했다.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 성경과 경전이라는 신앙 공간, 종교의 성전(聖典)을 매개로 꽃피었다. 대장경에는 불교의 성전이라는 신앙적 의미로서뿐 아니라 지식을 체계화하고 소통하고자 했던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다. 대장경판이 봉안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진리를 향해 나아간 당대의 노력을 보여주는 거대한 도서관과 같다. (중략)필사의 방식에서 목판 인쇄로의 발전은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장면 중 하나이다. 나..
[문득문득 편집이야기 01] 편집자의 기원 편집자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문헌으로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책의 기원에서부터 편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수메르 시대 점토판에도 글자를 고친 흔적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출판을 염두에 두면, 서양에서 편집자는, 이슬람의 그리스로마 문헌들이 차례로 번역되어 출판되던 ‘중세 해석자 혁명’ 전후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11세기에 띄어쓰기와 어순이 나타나면서 글의 체계가 정립되었고, 13세기에는 여러 가지 구두점이 발명되어 퍼져나가면서 스크립투라 콘티누아(scriptura continua)가 소멸했다. 14세기에는 책의 조직화가 더욱더 진전되면서 장절과 단락이 등장하고 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목차가 탄생했다. 따라서 출판 과정에서 글을 수정하고 조직하..
편집자의 정년퇴직 지난달, 제주 독립책방 연합에 초대를 받아 강연 겸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밤마다 나누었는데, 올해 환갑을 맞은 편집자 선배 한 분이 드디어 정년퇴직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아, 아쉬우면서 또 감격스럽다.출판과 같은 영세하고 변동성이 높으면서도 높은 지적 수준이 필요한 산업에서 평생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른 분야 사람들은 잘 모른다. 심지어 출판계 내부에서도 좀처럼 짐작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선배 역시 학술서와 교양서 분야에서 주목할 명성이 있었고, 나중에는 공기관의 출판 담당으로 일했기에 인생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고 본다.말이 나온 김에 ‘편집자의 직업 경제’를 들려주고 싶다. 25세에 연봉 2400만 원으로 편집자 일을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해마다 5% 정도 연..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만화 스토리 공부를 어떻게 했는가? 얼마전 『미생』의 작가 윤태호를 만나서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서 평소에 궁금했던 것을 몇 가지 물어 보았다. 만화의 이야기를 짜는 솜씨가 남다른데, 어떻게 이야기 공부를 했는지, 마감에 쫓기면서 작품을 하려면 힘들 텐데, 위기 관리 비결이 있는지 등이다. 아래에 따로 소개한다. 전문은 443호에 실린다. 책만 많이 읽으면 좋은 독자가 될 뿐이다. 작가가 되려면 별도의 공부가 필요하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만화 스토리 공부를 어떻게 했는가? 장은수(이하 장) 『미생』도 그렇고, 『내부자들』도 그렇고, 윤태호 작가의 작품은 소설로 옮기고 싶을 만큼 이야기가 아주 강렬하다. 특별히 이야기에 신경 쓰는 이유가 있는가?윤태호(이하 윤) 이미 지식과 정보는 온갖 곳에 넘쳐난다. 하지만 대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