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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책 세상 소식

출판 공론장의 출현을 기다리며 ― 《기획회의》 350호를 읽고



격주간 출판 전문지 《기획회의》(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드디어 350호를 넘겼다. 불황과 위기의 연속인 한국의 척박한 출판 현실에서 무려 10여 년을 훌쩍 넘긴 세월 동안 이만한 잡지가 계속해서 나왔다는 것은,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그 자체로 한국 출판사에 남을 기념비적 업적을 계속 세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령 350호를 맞이하여 편집자로부터 짤막한 의견을 보내 달라는 청탁서를 받았으나 회사 일정 탓에 미처 보내지 못하고 어느새 마감을 넘기고 말았다. 후회 막급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바빠도 《기획회의》만은 미루지 않고 집에 배달되어 오는 다음 날 출근하면서 지하철에서 곧바로 읽어 치우는 것이 편집자로서 이 잡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출판 관련 담론들을 만들어 가고, 편집에서 마케팅에 이르는 현장에 대한 보고를 축적하며, 출판의 미래를 여러모로 살펴서 기획해 가는 선후배 동료들의 분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드는 어떠한 책도 결국 시대의 파도 속에서 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 업에 대한 나의 오랜 질문, 그러니까 “편집자란 과연 직업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색도 개별 회사와 출판 분야를 넘어서는 공동의 노력 없이는 그저 헛된 몸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기획회의》 350호를 뒤적거리며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비분에 차 있는 강창래의 연재 글 「책을 바라보는 10가지 관점」은 어느새 31회에 이르러 정조의 문체 반정을 다루고 있다. 이 문제는 김탁환의 역사추리소설 『열하광인』을 만들었을 때 이래, 나 역시 계속 관심을 두고 공부해 왔던 분야라 눈길을 끌었다. 세계 전자책 시장의 미래를 읽어 가는 류영호의 재빠른 트렌드 분석도 벌써 14회째이고, 재기발랄 김류미의 「함께 만들어 가는 출판 마케팅 2.0」도 13회째로 북스피어 편을 다루었다. 두 사람의 글은 ‘가치’(value)라는 차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통찰력을 공급하는 흥미로운 연재들이다.

그러나 이번호에서 내가 눈여겨 본 할 글은 역시 ‘출판전문지가 사는 길’이라는 특집 아래 실린 글들이다. 그중에서도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책의 몰락, 서평의 죽음」과 출판평론가 변정수의 「평론가가 사라진 세상을 꿈꾸며」는, 어쩌면 같은 문제 의식에서 나온 좋은 글이었다. 이 글들은 책을 둘러싼 공론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룬다.

‘신문 북섹션’의 하향세(독자, 아니 판매에 대한 영향력 소멸)로부터 시작한 강양구의 글은 이를 “지식 교양 생태계”의 “붕괴” 징조로 여기고, 그 현실을 파고들어 간다. 그의 현실 진단은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정직하다. 


‘검색’과 ‘광고’가 섞인 지극히 한국적인 검색 사이트로 성공한 네이버의 모습은 ‘서평’과 ‘광고’가 섞인 지극히 한국적인 온라인 서점을 운영하는 몇몇 대형 온라인서점의 모습과 겹친다. 이런 게 과연 ‘지식의 민주화’인가. (중략) 그런 흐름을 설명하는 말로  ‘민주화’보다는 ‘우민화’가 더 잘 어울린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책을 둘러싼 의미망의 부재다.(26쪽)

북섹션이 최소한 명맥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가능한 대안은, 여전히 책의 권위를 인정하는 이들(소수의 출판인, 수백 명의 편집자, 저자, 역자, 독자들)이 양질의 서평을 싣고자 묵묵히 노력하는 북섹션의 생존에 따뜻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존이 가능해진 북섹션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국의 지식 교양 생태계를 보전하는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운이 좋다면, 이곳에서 책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29쪽)


책을 둘러싼 의미망의 붕괴, 그러니까 출판 공론장의 파괴를 다루는 그의 진단이 날카로운 것에 비해 서 그에 대한 대안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그리고 강양구의 말대로, 이것이 바로 한국 출판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소수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고,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를 볼 때, 대개 소수의 양심에 호소했던 조직은 빠르거나 늦거나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결국 대안 자체가 현실적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봐야 한다. 오랫동안 출판 현장을 함께해 왔던 한 기자의 이러한 절망적 현실 진단은 출판 담론의 일대 전환 없이는 더 이상 출판산업의 의미 있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현재의 출판 상황에 대한 좀 더 과감하고 정확한 진단이 책을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정말로 필요하며, 책을 둘러싼 의미망을 복원(?)하기 위해, 아니 건설하기 위해 출판계 전체에서 이에 대한 투자를 시급히, 그것도 대규모로 시작해야 함을 경고하는 고심에 찬 글이었다.

변정수의 글은 출판 평론의 문제를 다루지만 원론적인 차원에서나마 책을 둘러싼 의미망을 재구축하려는 시도에 대한 하나의 좋은 답변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의 글은 “모든 출판 편집자에게는 평론가의 안목과 언어가 필수적”(38쪽)이고, 더 나아가 “‘성인으로서의 건강한 분별’을 지닌 독자”(40쪽)라면 누구나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지식이 담긴 의견을 말하거나 그것을 글로 옮길 수 있으므로”(39쪽), 다시 말해서 잠재적으로 모두가 출판 편집자 또는 평론가가 될 수 있으므로 “출판 평론가란 다른 문화 영역의 평론가들과는 달리 ‘순수한’ 잉여”(40쪽)라고 주장한다. 이를 전제로 해서 그는 다음처럼 말한다.


출판 평론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면, 역량 있는 출판 평론가를 발굴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원고료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발표 지면을 넓히는 것보다, 다양한 현장의 편집자들과 나아가 독자들이 거리낌 없이 발언할 수 있도록 공론장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이다. (41쪽)

SNS 시대가 만들어 낸 것은 ‘더 개방적인 공론장’이 아니라 ‘말의 공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분별’의 건강함이 경쟁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공론장은 제아무리 진입 장벽이 낮다 해도 공론장이 아니다. (41쪽)


나는 이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출판의 문제는 “공론장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 또는  “‘분별’의 건강함이 경쟁의 척도가 되”는 공론장을, 그것도 장기 지속적으로 구축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을 읽다가 언뜻 굿리즈(Goodreads) 같은 소셜 독서 사이트가 하나의 대안으로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 사이트 역시 결국에는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Amazon.com)에 인수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수익 구조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는, 친구들과 함께 책에 대한 의견과 서평 등을 나누던 장소(공론장)가 갑자기 특정 온라인 서점에 고객을 모아 주는 집객 창구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어쨌든 신문 북섹션의 실질적인 붕괴 이래, 책을 둘러싼 사회적 의미망의 확산과 수축은, 솔직히 말해, 거의 전적으로 마케팅에 의존한다고 본다. 정말 통절할 일이다. 출판의 마케팅 의존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 출판에는 다음과 같은 나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출판사 내부에서 볼 때 이는 이른바 기본 판매 부수를 만들어 내기 위한 비용의 지속적 상승을 유발해 경영 수지를 악화시키거나 출판 노동자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에서 끊임없이 자사의 책을 떠들어야 하는, 때로는 강압적인 온라인 감정 노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판사 외부에서 볼 때 이는 사회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책들일지라도 마케팅 비용의 투여 여부에 따라 판매가 과열되는 현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이로 인한 독자 신뢰의 하락과 독서 시장 이탈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마케팅 자산을 확보하지 못한 소출판사들과 지명도 낮은 신인 저자들의 생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또 쉽게 독자의 주목을 끌기 어려운 새로운 스타일의 책들을 위한 시도를 점차 위축시키면서 출판 다양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공론장의 붕괴가 먼저인지, 마케팅 과열이 먼저인지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선후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한국 출판을 사로잡고 있는 구조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공론장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한국 출판이 진정한 부흥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 한국 출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랜덤하우스와 웅진싱크빅의 단행본 시장 진출에 따른 버블(과잉생산)과 스마트폰의 충격에 의한 소비 감소 문제를 해소하려 지속적으로 애쓰는 중이지만(이것이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의 진짜 정체다. 생산 과잉과 소비 감소의 동시 출현.) 설사 구조조정 이후에 다소 정상을 되찾더라도 파괴된 공론장의 회복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과도한 마케팅 비용 등으로 인해 새로운 위기가 닥쳐올 것이 틀림없다.

현재 한국 출판의 미래를 위한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기획회의》나 프레시안북스 같은 공론장을 한편으로 굳게 지키면서 신문, 방송, 인터넷 등에서 출판사나 서점과 분리된, 즉 상품 판매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공론장을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단기간에 저자-편집자-독자가 연결된 출판 공론장을 구축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찾기는 쉽지만은 않겠지만, 출판계는 하다못해 출판 공론장에 수익금을 투자하는 펀드라도 하나 마련하여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출판에 닥쳐 온 위기를 결코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