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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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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소설을 읽고, 쉰 살에 소설을 다시 읽어라 학교에 다닐 때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을 독파한 적이 있다. 작품마다 담고 있는 세계의 깊이와 넓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이때 힘들여 읽은 경험이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좋은 소설은 인생을 미리, 심지어 여러 번 살도록 해준다. 타인의 슬픔과 기쁨, 상실과 회복, 고난과 승리를 내 일로 수없이 체험하는 것은 다가올 어떤 인생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 준다. 스무 살에는 반드시 소설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다. 요즘 들어 이 말을 실감한다. 몇 해 전부터 한 달에 한두 권 정도 예전에 읽었던 고전 소설을 다시 읽는 중이다. 때때로 옛날에 내가 읽은 건 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나 내용을 잘못 기억해서가 아니다. 문학작품엔 스포일러가 없다. 좋은 작품은 결말..
사랑의 고고학 ― 잃다, 파다, 스며들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사랑의 고고학’을 실천한다. 작가는 언어의 섬세한 솔질로 기억의 지층을 굴착해 사랑의 흔적을 발굴한다. 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어린 나이에 주로 첫사랑의 형태로 파묻힌 이 사랑은 퀴어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낯설고 두렵고 들끓고 뜨겁고 위험하고 조심스럽다. 이 책에 담긴 청소년 퀴어 서사를 꿰뚫는 동사는 세 가지, ‘잃다, 파다, 스며들다’이다.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상실 이후를 살아간다. 「우리들의 우리들」의 은푸른하늘은 아빠가 없고,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의 서해림은 엄마가 세상을 떴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강희는 친구를 영원히 잃었고, 「사랑을 말할 때」의 장한나는 언어를 빼앗겼다. 사랑과 상실의 결합은 에로스를 더 애타게 하지만, 투사할 대상을 잃은..
겨울을 맞는 마음 며칠 전, 한밤중에 첫눈이 내렸다. 후배랑 김치전을 곁들여 한잔하는 중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송이가 뭉쳤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깥으로 슬쩍 나가서 손바닥을 공중으로 내밀자 피부에 닿은 눈이 스르르 방울졌다. 자연은 쉬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절기를 돌린다. 낳고 또 낳는 변화(易)야말로 세상의 이치다. 엊그제가 가을인 듯싶더니, 어느새 “이슬은 서리로,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겨울이 온 것이다. 때마침 어제(22일)가 소설(小雪)이었다. 눈 내릴 무렵에 적절히 눈이 온 셈이다. 위스춘의 『시간의 서』(강영희 옮김, 양철북, 2019)에 따르면, 소설과 더불어 “만물의 숨결은 흩어지고, 나고 자람은 거의 멎어 겨울이 온다.” 사나흘 전부터 과연 사람들 옷차림이 두꺼워지더니, 올..
“소설이 좋은데 싫어요”...우린 왜 책을 읽나? ―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의 의미 이홍 한빛비즈 이사와 함께하는 프레시안 좌담. 이번 달에는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대희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소설이 좋은데 싫어요"...우린 왜 책을 읽나? ―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의 의미 많은 학부모님들이 아이의 성적을 고민하시면서, 동시에 아이의 독서 습관도 걱정하실 겁니다. 어릴 적에는 분명 책을 끼고 살던 아이가 나이 들자 책을 멀리하고 스마트폰 게임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괜히 화가 치밀어 오른 경험을 하신 부모님이 적잖으실 겁니다. 이번 '표지 너머 책 세상'은 아이가 책과 친구가 되는 가장 확실한 비법을 알려드립니다. 여태 세계 수많은 부모가 직접 입증한, 정말 확실한 방법입니다. 굳이 힌트를 드리자면, 아이의 독서습관에 가장 결정..
이 청년을 보라 - 김동식 소설집 『회색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를 읽다 김동식 소설집 『회색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를 드디어 읽고, 작은 글을 하나 썼습니다. 《매일경제》에 실었던 칼럼은 조금 손보아 여기에 올려 둡니다. 이 청년을 보라 청년은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검정고시로 간신히 고등학교를 다녔을 뿐이다. 세상에 나와 주물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뜨거운 아연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했다. 온도를 높이면 어느새 단단한 쇠가 물렁대듯, 상상의 풀무를 밟아 답답하고 억울하고 암담한 현실을 녹이고, 간절한 바람을 덧붙여 가면서 환상적 현실을 빚어냈다.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난 것은 우발적이었다. 아무도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았기에, ‘글 쓰는 법’을 검색해 스스로 배운 후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소설로 옮겼다. 그러고는 평소..
[책과 미래] 아이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매주 토요일, 《매일경제신문》에 제 이름으로 나가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저의 관심사는 책이 기록한, 또 제가 경험했던 책의 인간들 이야기입니다. 저자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발상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저술하면서 창조성을 유지하는 것일까요.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인간들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칼럼이니까, 100% 맞출 수는 없겠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들을 써보려고 합니다. 아래에 옮겨 둡니다. 칼럼마다 반드시 제가 읽었던 책이 하나씩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이상하게도 전혀 없다. 졸린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 부모가 지칠 때까지 ‘하나 더’ 이야기를 ..
한국의 문학 독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한국의 문학 독서는 어떤 상황일까요. 모두들 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문학은 정말 위기에 빠졌을까요, 아니면 이 말 자체가 터무니없는 엄살일까요. 독서에 관한 최근 조사연구들을 종합해서 한국의 문학독서 실태에 대한 지도를 그려보았습니다. 문학이 위기에 빠졌다면 말로 문학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정확한 조사연구부터 행해야겠지요. 본격적인 조사연구가 있기 전에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바랍니다. 이 글은 《씀》 4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씀》은 전위문학의 잡지이지만, 전혀 이질적인 이 글을 실어 주는 아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편집진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문학 독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솔직히 고백부터 하자. 한국에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문학을 읽는지를..
[문화일보 서평] 동아시아 천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을 좇아서 _이은봉의 『중국이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천년의상상, 2016) 동아시아 천년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을 좇아서이은봉, 『중국이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천년의상상, 2016) ‘중국을 만들고 일본을 사로잡고 조선을 뒤흔든 책 이야기’(이하 『책 이야기』)라는 제목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정곡에 정곡을 더한 ‘퍼펙트 골드’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제목에 적힌 이 어마어마한 ‘책’은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소 거칠게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적어도 15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역사는 얼마만큼은 이 책과 함께 부침을 같이했다고 할 수도 있다. 『책 이야기』에서 다루는 대상은 이른바 『삼국지』다. ‘이른바’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책 이야기』에 나오는 『삼국지』가,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는 말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는 『삼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