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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띠지에 대하여

편집마왕 2025. 2.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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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는 한국-일본-중국에서 주로 사용되고, 서양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하드커버에는 대개 덧싸개(jacket)이 있어서 따로 띠지가 필요 없고, 페이퍼백은 저가 보급판이어서 띠지를 붙일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띠지는 반양장이라는 특수한 환경, 매대 경쟁이 치열한 서점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서양에선 띠지를 부르는 공식 명칭도 불분명한데, 영어로 belly band, book belt, Supplementary bands 또는 일본어 그대로 obi라고 부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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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북 디자인에선 덧싸개와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그 한 형식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듯하다. 띠지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덧싸개부터 살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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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대 이전의 책은 대부분 미제본 상태로 출판되거나, 맞춤형 제본으로 출판되었기에 출판사에서 따로 덧싸개를 두지 않았다. 책을 사서 제본한 후, 보호를 위해 가죽, 모피, 천 등으로 덧싸개를 마련한 것은 독자 본인이었다. 때때로 이런 미제본 책들을 포장지로 느슨하게 싸서 그 위에 간단한 정보를 표시하기도 했는데, 굳이 따진다면 이를 덧싸개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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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무렵, 윌리엄 피커링 출판사가 세계 최초로 천과 가죽으로 제본한 책을 출판했고, 대다수 출판사가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경쟁은 차이를 낳는 법. 1820년대 말, 영국 문학 연감 등에 최초로 덧싸개가 쓰이기 시작했다. 이때는 책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가 강했다. 포장지처럼 책을 완전히 감싸고, 접착제로 봉인해서 팔았다. (남아 있는 건 거의 없다. 읽으려면 찢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덧싸개는 제본된 하드커버에 직접 인쇄하는 기술이 일반화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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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양장본(하드커버)에서 일반적인 형태의 날개 달린 덧싸개, 즉 표지만 덮고 본문은 노출시키는 형태의 덧싸개는 1850년 무렵에 처음 출현했고, 1880년대에 보편화되었다.(초기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오늘날과 달리 얇은 종이에 코팅되지 않은 상태로 유통되었기에 대부분 구입 직후 또는 판매 시 벗겨서 폐기하는 게 관행이었다. 따로 디자인하지 않고 종이 색깔만 달리하는 경우가 흔했다. (선물용 판본으로 천을 씌운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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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무렵, 인쇄와 제본 기술이 발달해 제작 가격이 떨어지면서 비로소 덧싸개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 출판사가 나타났다. 문구, 삽화 등 장식적, 영업적 요소들이 모두 덧싸개로 옮겨졌다. 덧싸개 디자인이 매력적 요소로 바뀌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덧싸개를 보관하는 문화가 퍼져 나갔다. 가격 등도 판매 요소도 덧싸개에 인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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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덧싸개와 구분해서 따로 띠지를 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책 출간 이후, 언론 서평 또는 인플루언서 서평 등에서 마케팅에 활용할 문구 등이 있을 때, 이를 처리하기 위해 (2) 책 표지 디자인이 완성도가 극히 높아서 문구 등을 넣으면 훼손될 듯해서 디자인도 보호하고 마케팅 목적도 달성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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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는 날개 달린 덧싸개의 일종으로, 크기를 절반 또는 그 절반으로 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에 밝혔지만, 일본에서 사용하던 말(本の帶)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다만, 덧싸개와 달리, 사용 목적은 책의 보호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독자의 구매 의욕을 자극하기 위한 광고 문구, 추천문 등을 기재하기 위한 것이다. 얇고 쉽게 벗겨지는 재질로 만들어지는 게 일반적이기에 책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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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띠지가 처음 사용된 예는 1900년 민우사(民友社)에서 간행한 도쿠토미 로카의 『자연과 인생』으로 알려져 있다. 띠지 문구는 현재는 주로 편집자가 쓰지만, 일본에선 1945년 무렵에는 문인, 학자, 기자 등이 외주로 의뢰받아 쓰는 게 일반적이었고, 이를 전문으로 쓰는 카피라이터도 존재했다. 1960년대에는 띠지 문구를 공모하는 문학상이 기획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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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출판에선 프랑스에서 예외적으로 띠지가 자주 쓰인다. 이는 갈리마르 등 주요 문학 출판사들이 흔히 책 표지를 모두 똑같이 만들고, ‘문학의 계절’에 수상작이 생기면 빨간색 또는 파란색 띠지를 둘러서 콩구르상 수상 등의 문구를 표시해 알리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형태의 책 띠지는 프랑스보다 일본에서 먼저 시작된 게 아닌가 싶긴 하다.(확인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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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띠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일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아마 20세기 초부터 사용되었을 듯도 하나, 그 실체를 확인하는 서지학적 실증 연구는 아직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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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한, 띠지를 사용한 최초의 국내 서적은 1977년 민음사에서 펴낸 한수산의 『부초』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지만, 비닐 커버를 씌우고 띠지를 둘러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말을 넣었다. 디자인은 정병규 선생님이 하셨다. (하지만 이전에 띠지를 사용한 책이 있었을 가망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기록상 최초로 국내에서 띠지를 사용한 한수산의 『부초』 (민음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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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를 대중화한 것은 1990년대 김영사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용을 아끼려고 표지에 광고 문구를 인쇄하던 흐름을 거슬러, 과감하게 띠지를 둘러서 큼직하게 광고 문구를 새겼다. 이후, 점차 띠지 사용이 확산되었다. 특히, 연말에 선물용 도서로 소장본을 찍을 때, 예쁜 띠지를 두른 책들이 눈에 띠었다는 기억이 난다. 2000년 초반에는 이미 띠지 사용이 흔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띠지 같은 외적 요소에 신경 쓰지 말고 책이나 잘 만들라는 비판도 시작됐다. 띠지 문구의 과장성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이는 책에 대한 독자의 기대, 즉 진실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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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가 마케팅 영역을 넘어서 책의 소장 가치를 높이는 디자인 요소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이다. 이 무렵부터 책의 4분의 1 정도 크기로 규격화된 띠지 디자인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형태의 띠지가 시도된다. 나로서는 문학동네에서 나온 코맥 매카시의 『로드』가 아직도 기억난다. 물결 모양으로 책의 중앙까지 올라온 띠지가 인상 깊어서 디자이너와 책을 놓고 토론한 기억이 있다.  비스듬하게 자른 띠지를 둘렀던 『나쁜 사마리아인들』, 책 표지 전체를 거의 덮었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등도 기억난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은 당시 막 직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북디자이너들이다.

물결 모양으로 윗부분을 재단해서 독특한 느낌을 준 코맥 매카시의  『로드』(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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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책 띠지가 사라지진 않았으나, 친환경 열풍, 가격 거품 등의 논란이 일면서 다소 시들해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특수 종이를 사용하는 등 띠지의 소장 가치를 높이려는 [헛된?] 시도도 이어졌다. 아울러 할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 강력한 마케팅 요소가 생겼으므로, 띠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다소 관습적으로, 없으면 허전하니까 띠지를 두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띠지의 일상화 시대가 열린 것이기도 하다. 북스피어에서 띠지를 활용해서 퍼즐 게임을 진행한 것은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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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무렵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후, 책의 차별화 요소로 물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띠지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 등장한 마케팅 채널인 독립서점 영향이 적지 않았다. 주인장들이 직접 손글씨로 쓴 띠지 등이 주목받았고, 띠지를 재해석한 실험작이 눈에 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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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생각해서 띠지를 없애자는 얘기는 줄곧 나온다. 책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흔하다. 독자들을 향해 일제히 소리 지르는 것 같다는 비판도 자주 있다. 하지만 띠지는 출판사로선 독자의 눈에 띄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값싼 수단이다. 아마도 출판 문화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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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답니다.

나는 책 띠지는 보통 책 갈피 대용으로 쓰다가 버리지만, 이를 소중히 모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10년 무렵 일본 조사를 보면, 보관한다는 사람이 55% 정도, 국내에는 38% 정도다. 최근 조사는 없어서 잘 모르겠다.  

띠지만 모아서 보관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언제가 <기획회의>에 실렸던 듯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동아일보 김소민 기자의 ‘책 띠지’의 재발견… 벗기면 시 보이고, 펼치면 포스터 돼」에 짧게 코멘트했는데, 관련 자료가 너무 없어서 이 기회에 한번 정리해 보았다. 

동아일보 기사는 아래에 있다. 

https://www.donga.com/.../article/all/20250211/1310045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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