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시장 뒤흔드는 팬덤 독서
'초역 부처의 말(아이브 장원영)' '순수의 시대(뉴진스 민지)' '불안의 서(배우 한소희)' '다른 방식으로 보기(르세라핌 허윤진)'.
2025년 1월 2일 서울 양천구 교보문고에는 '스타의 책장'이 따로 있다. 책장에는 작가명 대신 유명 가수와 배우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들이 방송 등에서 언급해 판매량이 급증한 책을 모았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스타들이 방송이나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한 책들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며 "이들을 '이슈 도서'로 선정해 매장별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들의 말 한마디가 출판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아이돌그룹 아이브 소속 장원영이 지난달 15일 한 예능에서 추천한 일본 작가 고이케 류노스케의 '초역 부처의 말'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이 책의 지난달 판매량은 전월 대비 29배 가까이 급증해 1월 5주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2위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다.
이 책을 기획한 포레스트북스의 서선행 편집자는 "책을 찍는 속도가 책을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장원영 씨가 언급한 이후 3만 부가 추가로 더 팔렸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1만 권만 팔려도 '대형 안타'를 쳤다고 평가한다.
서 편집자는 "인문학을 탐구하고자 하는 흐름에 독자들이 호응한 것 같다"며 "'부처의 말'이라는 검증된 콘텐츠와 메시지가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해 5월 출간된 책은 장원영이 언급하기 전에도 이미 7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유명인의 추천에 판매량이 요동치다 보니 출판사나 서점에서도 이들의 독서 리스트에 주목한다. 출판업계는 아이돌 그룹 멤버나 배우는 물론이고 소설가 김영하, 영화평론가 이동진 등 유명인들 대상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다. 연예인 소속사에 신간을 보내는 출판사들도 적지 않다. 주요 서점들도 유명인들이 언급하는 책을 매대에 진열한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책을 추천하면 기본적으로 몇 만 부씩 나간다"며 "유명인의 책 추천에 판매량이 뛰는 전형적인 '팬덤 독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팬덤 독서는 좋아하는 스타의 독서 취향을 따라하는 현상을 말한다. 스타의 패션을 추종하는 데 이어 독서 취향까지 공유하려는 경향이다. 책 한 권 가격이 보통 2만 원을 넘지 않고, 구하기도 쉽다.
팬덤 독서의 영향력은 특히 인문, 교양 분야 도서에서 점점 커질 것으로 보인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가령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든지 이번 '초역 부처의 말'처럼 논란이 없고, 독서에 대한 내적 충동을 적당히 건드려 주는 고전들이 유명인의 언급에 반향이 크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팬덤 독서 열풍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론 출판시장 전체 파이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장 평론가는 "특정 책이 화제를 독점하다 보면 다른 쪽의 수요를 뺏는 경향이 있어 출판시장이 왜곡될 수 있다"며 "한강처럼 다른 여성 작가 소설로 독자를 확장하는 사례가 아닌 경우 동반 상승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